AI를 둘러싼 논쟁은 의식이나 저작권, 통제 가능성 같은 주제로 번지지만, 한 논평가는 실제 핵심 쟁점이 단 하나로 수렴한다고 정리한다. 바로 'AI가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을 인간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하나의 전제를 받아들이면 인간에게 남는 일자리가 없다는 결론이 거의 동어반복처럼 따라 나오고, 반대로 이를 부정하면 일자리가 남는다는 결론이 마찬가지로 자동으로 나온다. 이 글은 저자가 앞서 쓴 'AI에 관한 명상' 글의 부록이자, 지난해 나온 몇몇 논의에 대한 반론으로 쓰였다.
귀납으로 풀어낸 일자리 논쟁
저자는 세 가지 전제로 간단한 귀납 논증을 제시한다. AI가 어떤 일을 인간보다 잘하면 결국 그 일을 맡게 되고, AI는 모든 일을 인간보다 잘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두 갈래가 남는다. AI가 새 일자리를 만들지 않으면 AI가 모든 일을 하게 되고, 새 일자리를 만들더라도 그 일 역시 AI가 더 잘할 수 있으니 다시 1단계로 돌아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과거 공장 자동화가 로봇 유지보수나 소프트웨어 같은 새 직종을 만들었다는 반론에 대해, 저자는 그 새 직종이 수적으로도 부족했고 기술적으로도 1:1 전환이 불가능했음을 지적하면서, 무엇보다 이번에는 새로 생기는 일자리마저 원리적으로 AI가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 결정적 차이라고 본다.
저자가 보기에 AI가 '평범한 기술'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완전히 범용적(general)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운송을 혁신했지만 바리스타가 커피를 만드는 방식까지 바꾸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동차'를 발명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저자는 AI가 특정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주장이 갈수록 궁색해지고 있으며,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국 'AI는 꿈꾸거나 사랑하거나 웃지 못한다'는 식의 영혼에 대한 종교적 호소로 귀결된다고 말한다. 회계를 처리하려는 재무팀에게 그런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희소성이 사라지면 가치도 사라진다
AI가 결코 할 수 없는 단 하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직접 만든 것에 대한 수요는 언제나 남는다. 다만 저자는 이 수요를 신혼여행지에서 수제 목각이나 손뜨개 모자를 사는 상류 중산층의 취향 정도, 즉 세계 경제 전체로 보면 반올림 오차 수준의 틈새로 본다. 사람들이 진짜 '필요'로 하는 것은 출처를 따지지 않고 구매하며, '진정성'은 여러 욕구 중에서도 특히 '품질'보다 한참 낮은 순위에 놓이기 때문이다. 진정성이 값진 이유는 그 자체로 가치 있어서가 아니라 수요 대비 희소하기 때문이며, AI가 할 수 있는 일은 무한히 저렴해져 결국 무가치에 수렴한다는 논리다.
이 대목은 실무자에게 특히 시사적이다. 저자는 AI 글쓰기를 예로 든다. 한때 값을 치르고 사야 했던 세련된 문체가 누구나 쓸 수 있게 되자, 그 문체는 곧바로 '싸구려 공허한 사고'의 표지가 되어 사람들이 AI 냄새가 나는 글에 거부감을 보이게 됐다는 것이다. 오히려 엉성한 문장 부호와 소문자 표기가 진짜 사람이 썼다는 신호로 소비되는 역설이 나타난다. 반대로 코드처럼 우아한 가독성보다 기능이 중시되는 영역, 혹은 글쓰기가 취미가 아니라 노동인 영역에서는 AI 사용이 빠르게 늘어난다. 학술지 논문이나 법률 서면에서 AI가 차지하는 비중이 앞으로 줄어들 리 없다는 저자의 반문은 개발 현장의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수학계의 충격과 '측정 지표의 함정'
저자는 이 글을 수학계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밝힌다. 필즈상 수상자 테런스 타오는 최근 몇 달 사이 LLM의 수학 능력이 극적으로 향상돼 여러 분야의 미해결 난제를 풀 수준에 이르렀지만, AI 기업들이 문제 풀이를 벤치마크로 밀어붙이는 방식은 수학이라는 학문에 해롭다고 지적했다. 문제 풀이는 개념적 이해와 통찰이라는 본래 목표를 위한 도구이자 대리 지표일 뿐인데, '참/거짓' 명제를 점점 빠르게 대량 생산하는 일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키우기는커녕 그 토양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랜 훈련은 최종 답이 아니라 이해와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능력을 기르는 과정이었다는 그의 지적은, AI가 그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만 직접 산출할 때 도구와 목적이 어긋난다는 경고로 이어진다.
저자는 이를 '측정 지표를 목표로 착각하는 과적합(overfitting)'이라 부른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것(측정)과 수학을 더 접근 가능하게 만드는 것(목표)을 혼동한 채, 파괴를 민주화로 포장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이것이 방직기를 부수던 러다이트가 느꼈을 상실감과 다르지 않으며, 후세대는 역사 시간에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모델에게 '돌파구를 만들어내라'고 입력할지 모른다고 덧붙인다.
'통제할 시간이 있다'는 낙관에 대한 반론
이 글의 제목은 지난해 4월에 나온 에세이 'AI as Normal Technology'에서 따온 것으로, 그에 대한 반론이기도 하다. 원 에세이는 AI를 전기나 인터넷처럼 변혁적이되 '평범한' 기술로 보며, 기술 결정론과 AI를 자율적 초지능 주체로 보는 시각을 모두 거부한다. 핵심 전제는 AI가 급격히 폭주(FOOM)하지 않으므로 우리의 제도가 그 능력 증가에 대응할 시간과 여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에세이가 초지능의 악의적 위협에 집중한 'AI 2027'에 대한 대응으로 읽혔음을 언급하면서, 두 종류의 위험이 양자택일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저자의 최종 반박은 이렇다. AI는 '스스로 마음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축뿐 아니라 여러 축에서 비정상적인 기술이라는 것이다. 인간보다 뛰어난 도구가 세계 경제와 인간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바꿀지 실리콘밸리조차 제대로 씨름하지 않고 있으며, AI가 즉각 모든 일자리를 대체하지 못하도록 막을 뚜렷한 통제 장치도 보이지 않는다고 그는 지적한다. 이 글은 데이터나 실증 연구가 아니라 하나의 논증적 에세이라는 점, 그리고 '모든 것을 더 잘한다'는 전제 자체가 여전히 논쟁적이라는 점은 분명한 한계다. 그럼에도 기술의 성능 곡선만이 아니라 희소성과 노동 가치라는 경제적 축을 함께 보게 한다는 점에서, 코드와 문서 생산이 이미 AI로 빠르게 옮겨가는 국내 실무 환경에도 곱씹을 만한 문제 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