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가 존 버거가 1970년대에 내놓은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1장은, 발터 벤야민의 생각을 빌려 한 가지 전제에서 출발한다. 예술을 대량으로 복제할 수 있게 된 능력이 우리가 세계 속에서 예술을 만나는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는 것이다. 이 명제는 미술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미지를 복제하고 유통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오늘의 기술 실무자에게도 그대로 겹쳐 읽힌다.
버거의 논의는 '보는 것은 말보다 먼저 온다'는 관찰에서 시작한다. 아이는 말하기 전에 먼저 보고 알아본다. 그러나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는 결코 안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 저녁 해가 지는 것을 보지만, 지구가 돌아서 해에서 멀어진다는 지식은 그 광경에 끝내 들어맞지 않는다.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는 이 말과 봄 사이의 간극을 '꿈의 열쇠'라는 그림으로 지적했다. 중요한 점은, 보는 것이 자극에 대한 기계적 반응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바라보는 것만을 보며, 바라본다는 것은 선택의 행위다. 우리는 결코 한 사물만을 보지 않고 늘 사물과 우리 자신 사이의 관계를 본다.
보는 행위에는 또 하나의 성질이 있다.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또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저 언덕을 볼 수 있다고 인정하면 그 언덕에서 우리도 보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셈이다. 버거는 이 시선의 상호성이 말로 하는 대화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본다.
모든 이미지는 '보는 방식'을 담는다
버거가 쓰는 의미에서 모든 이미지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이미지란 처음 나타났던 장소와 시간에서 떼어내어 보존된, 재현된 광경이다. 그리고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담는다. 사진조차 예외가 아니다. 흔히 믿는 것과 달리 사진은 기계적 기록이 아니다. 우리는 사진을 볼 때마다 촬영자가 무수히 가능한 광경 가운데 바로 그 장면을 골랐다는 사실을 희미하게나마 의식한다. 가장 평범한 가족 스냅사진에서도 그렇다. 더구나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우리 자신의 보는 방식 또한 그 해석에 개입한다. 스무 명 가운데 우리가 눈여겨보는 한 사람은 우리의 이유 때문에 선택된다.
여기서 버거는 '신비화(mystification)'라는 핵심 개념을 꺼낸다. 그는 프란스 할스를 다룬 한 권위 있는 연구서를 예로 든다. 여든이 넘은 빈민 화가 할스가, 자신이 공공 자선에 기대어 겨우 겨울을 나던 바로 그 자선기관의 남녀 이사들을 그린 말년의 두 초상이 대상이다. 저자는 이 그림에 이사들에 대한 비판을 읽어 넣어선 안 된다고 못 박고, '조화로운 융합'이나 '잊을 수 없는 대비' 같은 구성상의 용어로 작품을 설명한다. 버거가 보기에 이런 어휘는 그림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실제 삶의 체험에서 '사심 없는 예술 감상'의 차원으로 옮겨 버린다. 그 결과 빈민 화가와 그를 심사하듯 바라보는 이사들 사이의 긴장, 즉 그림의 진짜 드라마는 사라진다. 버거는 신비화란 어려운 어휘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할 수 있는 것을 설명으로 치워 버리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단일 시점이라는 오래된 관습
마지막으로 버거는 원근법을 짚는다. 르네상스 초기에 확립된 유럽 특유의 이 관습은 모든 것을 보는 이의 단일한 눈에 집중시킨다. 등대 불빛과 같되 방향만 반대로, 모든 외양이 하나의 눈으로 수렴한다. 세계가 한때 신을 위해 배열되었다고 여겨진 것처럼, 가시 세계가 한 관찰자를 위해 배열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관습에는 모순이 있다. 신과 달리 그 관찰자는 한 번에 한 자리에만 있을 수 있다. 카메라의 발명 이후 이 모순은 서서히 드러났고, 버거는 1923년 소비에트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의 글을 그 증거로 인용하며 1장을 맺는다.
실무적 함의는 분명하다. 데이터 시각화, 추천 알고리즘, 컴퓨터 비전,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모두 특정한 '보는 방식'을 담은 이미지이자 재현이다. '기계적 기록' '객관적 데이터'라는 수사는 할스 연구서의 미학적 어휘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즉 선택과 관점, 그리고 누가 그 선택으로 이득을 보는가라는 물음을 말끔하게 덮어 버린다. 버거의 질문 '누가 이 결핍으로 이득을 보는가'는 제품 안의 기본값과 지표, 노출 순위를 설계하는 사람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다만 한계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이 글은 1972년의 미술사·이데올로기 비평이며, 디지털 복제나 생성형 AI를 직접 다루지 않는다. 신비화라는 틀은 '의사(擬似) 마르크스주의적 신비화'로도 쉽게 변질될 수 있다고 버거 스스로 경계한다. 그럼에도 '이미지는 결코 중립적인 기록이 아니며 언제나 보는 방식을 담는다'는 명제는, 기술로 세계를 재현하는 모든 작업에 던지는 질문으로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