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의 한 장면에 우스꽝스러운 음악을 입히면, 살인마가 갑자기 익살맞은 존재로 바뀐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음악이란 결국 여러 수학적 관계 속에 놓인 음과 리듬의 묶음, 바깥 현실과 거의 무관한 추상의 영역인데, 어째서 그것이 우리를 움직이고 눈앞의 세계마저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걸까. 에세이스트 헨리크 칼손은 이 소박하지만 집요한 질문을 들고 음악심리학과 철학을 가로지른다.
그의 출발점은 지극히 사적인 장면이다. 스웨덴 라디오 P2에서 사라 파르크만이 엮은 세계 민속음악 믹스테이프가 흘러나오고, 소련 붕괴 몇 달 뒤 모스크바에서 녹음된 사미족의 요이크가 차 안을 채운다. 뒷좌석의 아홉 살 딸은 눈을 감고 '작은 영화'를 본다고 말한다. 그는 자갈길로 차를 꺾어 걷는 속도까지 늦추고 창밖의 너도밤나무를 올려다보는데, 음악에 감싸인 나무들이 전에 본 적 없는 낯선 모습으로 다가온다. 음악은 어떻게 이런 변형을 일으키는가.
지각을 해킹한다는 설명, 그리고 그 균열
음악심리학의 한 전통은 음악을 회화에 빗댄다. 우리 뇌에는 소리로 세계와 사회적 관계를 가늠하는 예민한 청각 처리 체계가 있다. 무언가가 멀리 있는지 다가오는지,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 상대가 어떤 감정인지를 우리는 소리의 미세한 결에서 읽어낸다. 이 관점에서 음악은 그 지각 체계와 기대를 가지고 노는 일이다. 슬플 때 말에 단3도가 자주 섞이니, 피아노로 그 음정을 치면 뇌가 '슬픔'으로 패턴 매칭한다는 식이다. 음악은 감정적·공간적 단서를 엮어 분위기나 이야기, 풍경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생물학적 해킹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깔끔한 이야기에는 균열이 있다. 그런 연구의 상당수가 서구, 그것도 미국 대학생 표본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연구자들이 현장으로 나가 파키스탄 북서부의 칼라시족에게 물으면 결과가 뒤집힌다. 칼라시족은 단화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서구 청취자가 밝다고 느끼는 장화음을 오히려 '이상하다'고 평하며 옥타브 안의 가장 불협한 4음 화음보다도 덜 유쾌하다고 답한다. 음악이 인간의 특정 버튼을 똑같이 누르는 보편 장치가 아니라, 타고난 청각 능력이 문화적 연상과 규범에 의해 길들여진 결과라는 뜻이다.
'의지' 같은 형이상학과 그 공허함
칼손은 두 설명 모두에 만족하지 못한다. 마을 성가대에서 낯선 이웃들과 함께 봄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때 밀려드는 연결감은, 뇌의 음성 처리 회로를 자극했다는 말로는 너무 얇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다. 그는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가 '의지'라는 근원적 실재의 겉모습이라 보았고, 다른 예술이 그 의지가 빚은 사물의 그림자만 말하는 반면 음악은 의지 그 자체를 직접 그린다고 했다. 인간 역시 의지의 발현이기에, 음악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가장 깊은 본성을 알아본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신이나 의지를 전제하고 음악을 그 선물로 돌리는 설명은 무엇이든 설명해버리기에 사실상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경이를 지워버린다.
창발로 읽는 음악, 그리고 실무자의 거리감
칼손이 끝내 기대는 개념은 '창발(emergence)'이다. 음악은 현을 튕기고 감정 처리를 건드리며 몸의 움직임을 타인과 맞추는, 작고 평범한 행위들로 지어진다. 그러나 거기서 솟아나는 실존적 경험은 재료만 들여다봐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모래 알갱이 하나로는 사구가 움직이고 충돌하며 모래를 교환하는 성질을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는 수학의 공리를 예로 든다. '모든 자연수에는 후자가 있다', '서로 다른 수는 서로 다른 후자를 갖는다' 같은 지루한 규칙 목록 안에 수백 년을 탐구해도 끝나지 않는 구조가 숨어 있다. 그를 불만스럽게 한 것은 바로 이 거리, 구성 요소의 단순함과 결과의 광대함 사이의 간극이었다.
이 지점이 복잡계와 신경망을 다루는 IT 실무자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다. 단순한 규칙과 미시 상호작용에서 설명 불가능해 보이는 거시 행동이 솟아오르는 현상은 분산 시스템, 대규모 모델,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반복해 마주치는 양상이다. 창발적 층위는 그 자체의 개념과 언어를 요구하며, 아래층의 어휘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우리를 들어올린다'거나 '더 깊은 실재와 마주한다'는 음악에 대한 시적 표현이 어쩌면 최선의 설명이라는 칼손의 결론은, 복잡한 시스템을 환원적으로 해부하려다 한계를 만나는 경험과 겹친다.
물론 이 글은 측정된 메커니즘을 제시하는 과학 논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사유를 좇는 에세이다. 칼라시족 사례나 문화 의존성 같은 구체적 근거를 빼면, 창발이라는 틀 역시 설명이라기보다 질문을 더 높은 층위로 옮겨놓는 재구성에 가깝다. 그럼에도 남는 통찰은 분명하다. 단순한 재료에서 거대한 의미가 피어난다는 사실을 '당연하다'가 아니라 '놀랍다'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소리 안에서 우리는 하나의 대륙을 발견했고, 그 가능성의 공간은 매주 새로운 감정을 열어줄 만큼 넓다. 복잡한 것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에게, 작은 규칙이 품은 광대함 앞에서 겸손해지는 이 감각은 곱씹을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