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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운하에 8년간 갇힌 14척, 국경을 지운 자치 공동체 이야기

수에즈 운하에 8년간 갇힌 14척, 국경을 지운 자치 공동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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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6월 5일 아침, 블루 퍼널 소속 화물선 아가페노르호의 3등 항해사 피터 플랙은 수에즈 운하 남쪽에서 북상하던 호송선단 위에 있었다. 선장은 파이프와 호루라기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전하며, 이상한 것이 보이면 알리되 이집트 도선사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9시 무렵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동쪽 태양을 등지고 나타나 저공으로 폭탄을 투하했고, 엘 카브레트의 이집트 공군기지가 초토화됐다. 같은 날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운하를 지나던 8개국 화물선 14척을 정지시켰고, 이튿날 운하 양끝을 봉쇄했다. 이렇게 배들은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 사이 그레이트 비터 호수에 갇혔다.

6일 만에 전쟁은 끝났지만 나세르는 배를 풀어주지 않았다. 협상 카드로 쓰려는 것인지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운하는 유럽과 아시아·아프리카를 잇는 지름길이었고, 이 길이 막히면 배들은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야 했다. 리버풀로 귀항하던 아가페노르호에게는 8,200km가 더 붙는 우회였다. 그러나 봉쇄는 단기간에 풀리지 않았다. 1969년 소모전, 1973년 중동전쟁이 이어지며 운하 재개 준비는 거듭 미뤄졌고, 배들은 결국 8년 가까이 억류됐다.

초기 몇 주가 가장 힘들었다. 이집트 당국의 연락은 끊겼고, 물이 부족해 선원들은 바닷물을 증류해 마셨지만 맛이 형편없었다. 신선식품도 바닥나기 시작했다. 선주들이 배들끼리 식료품을 교환하도록 허용하면서, 생선·고기·해산물·과일·달걀·차·쌀에 와인과 맥주까지 서로 나눴다. 6월 26일부터 무전이 금지되자 선원들은 구명정을 타고 배 사이를 오가며 물자를 바꾸고 안부를 나눴다. 위험이 가시자 체스와 음악, 수영과 일광욕이 일상이 됐다.

국적을 폐지한 미니 유엔

갇힌 14척은 냉전의 양 진영에서 왔다. 서방에서는 영국 4척, 프랑스·미국 각 1척, 서독 2척, 중립국 스웨덴 2척이었고, 동구권에서는 폴란드 2척과 체코슬로바키아·불가리아 각 1척이었다. 1967년 10월, 이들은 스스로 그레이트 비터 호수 협회(GBLA)라는 자치 공동체를 만들고 첫 결정으로 '모든 국적의 폐지'를 선언했다. 동서를 막론하고 모두를 동등하게 대했고, 선장들도 활동에 참여하며 이름으로 불렸다. 1968년 합류한 브라이언 매커너스 선장은 '캡틴 브라이언'이 됐다. 매주 일요일 '교회' 모임이 열렸는데, 보트에 맥주 두 상자가 먼저 실리는 독특한 예배였다. 이 자리에서 공구·자재·기술을 필요에 따라 무상으로 주고받는 논의와 각종 행사 준비가 이뤄졌다.

호수는 항해에 최적이었다. 선원들은 구명정과 조정용 보트에 돛과 용골을 달아 매달 레가타를 열었다. 포트 인버카길호 갑판은 화물 그물을 골대 삼은 축구장이 됐고, 4대4 경기는 거칠었다. 1968년 9월에는 멕시코 올림픽에 맞춰 폴란드 자카르타호 선원들이 활과 과녁, 수구 골대, 매트리스를 활용한 높이뛰기장까지 만들어 '미니 올림픽'을 열었다. 폴란드가 종합 우승했고 시상대에서 국가가 울려 퍼졌다. 편지가 유일한 소통 수단이던 선원들은 감자·리놀륨 판화나 커피 가루로 직접 우표까지 만들었는데, 폴란드 선원 카시미르는 배 14척을 하나하나 담은 우표를 제작했다.

실무자가 곱씹을 만한 대목

이 이야기가 오늘의 조직에 주는 울림은 분명하다. 명령 체계가 마비되고 외부 지원이 끊긴 극한 상황에서, 서로 다른 국적과 체제의 사람들이 위계를 낮추고 필요 기반의 자원 공유 규칙을 스스로 세웠다는 점이다. 물자 교환, 기술 공유, 정기 행사라는 반복 리듬이 불확실성 속에서 공동체를 지탱했고, 선장이 이름으로 불린 것은 형식이 아니라 협업 방식의 전환을 상징했다. 낯선 사람들이 오래 함께 버텨야 할 때, 규칙과 의례와 놀이가 어떻게 신뢰의 인프라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다만 이 경험을 낭만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억류 초기의 고립과 식수 부족, 가족과 연락이 끊긴 스트레스는 실재했고, 플랙은 부치지 못한 편지를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선주들은 비용을 줄이려 배를 짝지어 계류하며 인원을 감축했고, 1970년 중반에는 단 50명이 함대를 관리했다. 자율 공동체라 해도 결국 기업의 비용 계산과 국가 간 정치라는 외부 조건 위에 얹혀 있었던 것이다.

1974년 봄, 사다트 대통령의 운하 재개 방침에 따라 이스라엘 전차와 격추된 항공기, 여객선 잔해와 기뢰를 걷어내는 국제 인양 작전이 시작됐다. 1975년 5월 마침내 출항이 허용됐고, 녹슬고 페인트가 벗겨진 선체 여럿이 자력으로 운하를 빠져나갔다. 운하는 봉쇄된 지 정확히 8년째 되는 1975년 6월 5일 다시 열렸다. 2017년 6월 리버풀 머지사이드 해양박물관에서 열린 50주년 재회에는 약 100명이 모였고, 90세가 된 캡틴 브라이언과 옛 동료들이 수십 년 만에 다시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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