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카네기멜런대학의 매뉴얼 블럼 교수가 대학원 신입생을 위해 남긴 짧은 글은 언뜻 학계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읽기, 셈하기, 연구, 글쓰기'라는 네 가지 축은 논문을 쓰지 않는 개발자에게도 그대로 옮겨 붙는다. 새로운 기술 문서를 소화하고, 남이 이미 풀어 놓은 문제와 마주하고, 오래 붙들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난제를 다루는 일은 실무 엔지니어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블럼의 조언을 학위 취득 안내가 아니라 어려운 문제를 다루는 사고법의 모음으로 읽으면 얻을 것이 많다.
책은 두루마리가 아니다
블럼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라고 말한다. 두루마리와 달리 책은 임의의 위치에서 펼쳐 읽을 수 있는 '랜덤 액세스' 매체라는 것이다. 특히 수학이나 물리처럼 어려운 자료라면 이해되는 부분 아무거나 먼저 붙잡고, 여백에 메모하며 읽으라고 권한다. 그렇게 하면 다음번에 다시 펼쳤을 때 조금 더 읽을 수 있고, 그 반복으로 대단히 어려운 내용도 점진적으로 익힐 수 있다. 두꺼운 명세서나 낯선 코드베이스, 논문 기반 라이브러리를 앞에 둔 개발자에게 이보다 실용적인 조언은 드물다. 완독을 목표로 삼다 지쳐 덮는 대신, 이해되는 조각부터 확보하는 편이 낫다.
블럼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읽으면서 쓰라는 것이다. 그는 MIT의 수학자 버트램 코스탠트가 늘 책상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던 모습을 회상하며, 읽은 것을 옮겨 적는 일이 어려운 자료를 익히는 가장 즐겁고 이로운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그는 계산이론으로 비유를 확장한다. 유한 오토마타는 덧셈은 해도 곱셈은 못 하는 반면, 종이와 연필을 가진 튜링 기계는 계산 가능한 모든 함수를 처리한다. 둘의 유일한 차이가 '쓸 수단'이라는 점은, 쓰지 않으면 인간의 사고 역시 유한 오토마타 수준으로 쪼그라든다는 은유다.
막힌 문제 앞에서의 태도
생각하는 법에 대한 조언들은 특히 흥미롭다. 블럼은 클로드 섀넌이 어린 시절 퍼즐에 막혔을 때 형이 '내가 힌트를 하나 줄 수 있어'라고 말한 것만으로 풀렸다는 일화를 든다. 그 힌트는 스스로에게도 언제든 줄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또 우메시 바지라니가 학부 시절 한 학기에 여섯 과목을 소화한 비결로 '어려운 정공법 대신 지름길을 찾는다'는 태도를 소개한다. 문제에는 짧고 영리한 해법이 있을 때가 많다는 믿음이다.
남이 먼저 답을 낸 상황을 다루는 방식도 실무적이다. 오래 붙들었지만 못 푼 문제를 남이 풀었다면, '이 문제를 풀려면 나는 어떻게 생각했어야 했나'를 되짚으라고 한다. 반대로 내가 성공적으로 풀었는데 이미 누군가 발표한 경우라도 낙담하지 말고 그 논문을 읽으라고 조언한다. 그의 경험상 발표된 결과의 약 50%는 내 것과 전혀 다르고, 25%는 같지만 내 것만 못하며, 나머지 25%만이 더 낫다. 결국 절반 이상은 여전히 발표할 여지가 있고, 더 나은 25%는 배움의 기회라는 것이다. 이 확률 감각은 이미 해결된 듯 보이는 문제를 마주한 개발자에게도 위안이자 실천 지침이 된다.
블럼이 지식의 강력한 원천으로 꼽는 것은 모순이다. 어떤 명제가 참이라고도 거짓이라고도 증명된다면 무언가 잘못됐다는 신호이고, 그것이 곧 새로운 발견의 단서다. 거짓말쟁이 역설, 정지 문제, 양자역학의 여러 역설이 그런 예로 등장한다. 그는 어떤 명제 S가 참임을 증명하려 할 때 일부러 거짓임을 증명해 보라고 권하는데, 설령 참이더라도 그 시도가 통찰을 주며 우리의 직관은 자주 틀리기 때문이다.
좁게 파되 세계를 보라
박사 과정의 본질에 대해 블럼은 '아주 좁아서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주제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처음엔 세상의 티끌 같은 작은 조각으로 보이지만, 깊이 파고들수록 그 안에서 세계 전체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본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로 이를 압축한다. 동시에 안다는 것이 진실을 확인하는 '탐색'임을 강조하며, 자신이 중앙값 문제를 다룰 때 정렬만큼의 비교가 필요할 것이라 믿었다가 O(n) 비교로 찾을 수 있음을 발견하고 놀랐던 경험을 든다. 답이 예상한 형태가 아닐 수 있고, 예/아니오를 기대했는데 제3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경고다.
이 글의 한계도 분명하다. 20여 년 전 이론 컴퓨터과학자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쓴 개인적 에세이인 만큼, 지도교수와의 관계나 논문 발표 같은 학계 맥락이 전제로 깔려 있다. 코드 리뷰, 협업 도구, 검색으로 즉시 참고 자료를 찾는 오늘의 실무 환경을 직접 겨냥한 조언은 아니다. 그럼에도 읽으며 쓰기, 스스로 힌트 주기, 반증을 통한 검증, 모순을 단서로 삼기 같은 사고 습관은 도구가 바뀌어도 낡지 않는다. 블럼이 인용한 새뮤얼 존슨의 말처럼 '모든 이론은 자유의지에 반하고, 모든 경험은 그것을 지지한다'는 긴장 속에서, 결국 어려운 문제를 오래 붙들 수 있는 힘은 그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마지막 조언이 가장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