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남동부의 괴베클리테페는 약 1만 2,000년 전 수렵채집민이 거대한 T자형 석주를 세운 유적으로, 인류가 농경 정착보다 먼저 기념비적 건축을 시작했다는 증거로 주목받아 왔다. 그런데 1995년 발굴이 시작된 이래 이곳에서는 수백 점의 인골 파편이 건물 곳곳에서 흩어진 채 발견되어 왔다. 이 뼈들이 어떤 매장 관습의 결과인지, 아니면 다른 과정으로 흩어진 것인지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문제였다. 최근 연구진이 유적에서 처음으로 온전한 형태의 무덤 두 기를 확인하면서, 이 수수께끼에 대한 새로운 설명이 제시됐다.
두 무덤은 토기 사용 이전 신석기 B기(PPNB), 즉 기원전 8,700년에서 8,000년 사이로 편년된다. 연구는 이 무덤에서 나온 뼈를 기념비적 건물에서 수습된 흩어진 유해와 비교했고, 그 결과 흩어진 파편 상당수가 원래는 유적 곳곳의 평범한 매장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후의 침식 작용이 이 뼈들을 경사면 아래 건물 쪽으로 쓸어내렸다는 것이다.
두 무덤이 보여준 것
첫 번째 무덤은 직사각형 건물의 회반죽 바닥 아래 구덩이에서 발견됐다. 이 안에는 최소 세 사람의 유해가 들어 있었는데, 35세 이상의 여성, 20~30세 남성, 11~14세 소녀로 구성됐고 일부 뼈로 미루어 네 번째 인물이 더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유해는 원래 놓였던 자세를 유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두개골들은 구덩이 한쪽에 모여 있었고 나머지 뼈는 별도의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다만 손과 발의 작은 뼈들이 남아 있었다는 점은, 처음에는 완전한 시신 혹은 완전한 사지가 무덤에 안치됐음을 시사한다.
이 뼈들에서는 절단흔이나 열에 의한 손상, 붉은 안료(오커)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일부에서 설치류가 갉은 자국이 있었고, 상당수는 사후에 부러진 것으로 매장 토양의 압력이나 변화가 골절을 일으킨 것으로 분석됐다. 두 번째 무덤에는 20~30세 여성으로 추정되는 젊은 성인 한 명이 왼쪽으로 눕혀진 굴장 자세로 동쪽을 향해 안치돼 있었다. 골격 대부분은 제자리에 남아 있었지만 많은 뼈가 심하게 부서진 상태였다.
흩어짐을 만든 자연의 힘
손상의 큰 원인은 석회질 침전물이었다. 침전물이 뼈 표면을 덮고 내부 구조로 파고들어 균열을 만들고 이후 파손으로 이어졌으며, 토양 압력이 큰 뼈를 부러뜨렸고 설치류 활동이 작은 조각들을 이동시켰다. 이런 변형 양상은 유적 전역에서 수습된 928점의 인골 파편에서 관찰된 것과 밀접하게 일치했다. 바로 이 일치가 왜 파편들이 그토록 넓게 흩어진 채 발견되는지를 설명해 준다.
앞선 연구들은 다른 가능성도 제기해 왔다. 일부 인골, 특히 몇몇 두개골에는 깊은 절단흔 같은 의도적 처리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두개골 파편은 408점인 반면 다른 부위의 파편은 283점으로, 머리뼈가 과도하게 많이 남아 있다. 이는 괴베클리테페의 일부 사람들이 사후에 특별한 대우를 받았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흩어진 뼈 전체가 하나의 조직화된 매장 의례에서 나왔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뼈들은 약 3,000제곱미터에 걸쳐, 수 미터 두께의 퇴적층을 관통해 분포하기 때문이다.
새 연구가 제시하는 과정은 이렇다. 사람들은 정착지의 높은 지대에 있는 건물 바닥 아래에 매장됐다. 마운드(퇴적 언덕)가 커지면서 흙과 잔해가 침식과 사면 붕괴를 통해 아래로 이동했고, 인골도 이 퇴적물과 함께 쓸려 내려가 기념비적 건물 안에서 다른 물질과 뒤섞였다. 이 시나리오는 고립된 뼈가 원래 무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오는 이유, 그리고 나이와 성별이 제각각인 사람들의 유해가 한데 뒤섞여 나타나는 이유를 함께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흩어진 뼈는 반드시 특이한 매장 의례를 뜻할 필요가 없으며, 바닥 아래에 이뤄진 평범한 매장이 마운드의 이동으로 뒤흔들린 결과일 수 있다. 다만 연구진은 다른 매장 관습의 존재를 배제하지 않는다. 일부 두개골의 의도적 변형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고, 인근 신석기 유적들은 유해를 다루는 또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실무적으로 보면 이 연구는 고고학 자료 해석에서 매장 행위와 매장 후 자연적 교란을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일깨운다. 유적의 형성 과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면 흩어진 유물을 의례의 산물로 과대 해석하기 쉽다는 점이다. 다만 이런 관습이 실제로 언제 행해졌는지 확정하려면 추가적인 골 분석과 직접 연대측정이 필요하다는 한계도 함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