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규격으로 바뀐 포뮬러1 머신이 처음으로 비 오는 조건에서 치른 레이스가 전례 없는 방식으로 멈춰 섰다. 젖은 세팡 서킷에서 열린 그랑프리는 다수의 차량이 파워유닛 소프트웨어 문제를 겪으면서 스타트가 취소됐다. 드라이버들이 포메이션 랩에서 아주 낮은 속도로 주행하던 순간, 파워유닛 컨트롤러의 우천 모드가 작동하며 버그가 발생했고, 여러 머신이 두 바퀴 예정이던 포메이션 랩 곳곳에서 공회전(아이들) 상태에 갇혀 버렸다. 스로틀을 밟아도 동력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레드플래그 중 급조된 패치
상당수 차량이 아이들 루프에 걸리자 FIA는 뒤이은 레드플래그 중단 시간 동안 소프트웨어 패치를 급히 작성해 11개 팀 전체에 배포해야 했다. 패치는 문제가 발생한 구간에서 평소 적용되던 우천 출력 제한을 해제하는 방식이었다. 결국 레이스는 50분 지연된 끝에 출발했다. 이후 경기 자체는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서 볼 만했지만, 소프트웨어 결함으로 스타트가 지연된 장면은 종목의 이미지에 뚜렷한 흠집을 남겼다.
이번 사건이 특히 뼈아픈 이유는, 드라이버들이 이미 2026 규격의 배터리 비중이 큰 레이싱과 과도하게 개입하는 전자 제어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르세데스 동력 드라이버 중 드물게 버그를 겪은 란도 노리스는 "그냥 끔찍하다. 우리가 그런 전자 장비를 전혀 쓰지 말아야 한다는 걸 증명한 셈"이라며 F1이 하이브리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평소 지론을 거듭 내세웠다.
오스카 피아스트리는 "버그 때문에 F1 레이스가 지연되는 건 처음 봤다"고 비꼬면서도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1초 정도 갇혀 있었다. 이 차들은 터보가 작동하지 않으면 엔진을 쓰느니 차라리 손으로 미는 게 낫다"면서도 "해명이 나오기 전에 손가락질하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통제권을 빼앗긴 드라이버들
페라리 동력 차량 중 하나를 몰았던 캐딜락의 세르히오 페레스는 더 날이 서 있었다. 그는 "렌탈 카트를 타다가 시간이 다 된 느낌이었다. 페달을 밟고 가속하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며 "오늘 벌어진 일은 이 종목에 전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스의 올리버 베어먼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무언가가 스로틀 페달을 끊어 버린 상황을 "무서웠다"고 표현했다. 그는 "FIA가 우리 스로틀 페달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페달이 작동을 멈췄는데, 보니 다른 차들도 다 멈춰 있었다. 엔진이 그냥 공회전만 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이 장면은 드라이버가 차량을 통제한다는 레이싱의 기본 전제가 소프트웨어 한 줄에 좌우될 수 있음을 드러냈다. 아스톤마틴의 페르난도 알론소는 "이제 이 종목에는 기술이 너무 많다"며 관중조차 그것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우승을 차지한 막스 베르스타펜은 자신의 느린 출발이 버그를 처음 촉발한 당사자였다. 그는 포메이션 랩의 혼란을 실버스톤의 레고 고카트 레이스에 빗대며 "백미러를 봤더니 여덟 대가 여전히 기어가고 있었다. 이게 바로 우리가 가진 문제다. 이 엔진들은 너무 복잡하고 소프트웨어가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실무적으로 읽어야 할 지점
이번 사태는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 안전·성능 로직이 소프트웨어에 집중될 때 특정 조건의 엣지 케이스가 어떻게 전체 시스템을 동시에 마비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저속 주행과 우천 모드라는 두 조건이 겹치는 상황은 실제 레이스 이전까지 충분히 검증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우천 레이스가 처음이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동일한 제어 로직을 11개 팀이 공유하는 구조 탓에 문제가 개별 차량이 아니라 그리드 전체로 번졌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반면 FIA가 중단 시간 안에 패치를 작성해 전 팀에 배포하고 레이스를 재개했다는 사실은, 이런 시스템이 현장에서 신속하게 업데이트될 수 있는 구조를 갖췄다는 양면성도 함께 드러낸다. 다만 긴급 패치가 평소의 출력 제한 로직을 해제하는 방식이었던 만큼, 그 변경이 안전 측면에서 어떤 의미였는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다. 피아스트리의 말처럼 공식 해명이 나오기 전까지 원인과 책임을 단정하긴 이르며, 종목이 이번 경험에서 무엇을 학습하느냐가 2026 규격의 신뢰도를 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