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가속기 수요가 폭발하면서 데이터센터 내부 연결의 병목이 연산 자체가 아니라 '네트워크'로 옮겨가고 있다. 신호를 더 빠르게 보내야 할수록 구리 배선이 닿을 수 있는 거리는 짧아지고, 발열과 전력 소모는 늘어난다. 이른바 '구리의 벽'이다. 디지털리얼티의 최고기술책임자 크리스 샤프가 올해 초 BBC에 "우리는 구리의 끝에 와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안으로 지목되는 것이 빛으로 데이터를 실어 나르는 광(光) 네트워크, 즉 포토닉스다. 전력을 덜 쓰고 열을 덜 내면서 비싼 GPU에 더 많은 데이터를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Advanced Photonics Coalition(APC)이 이번 주 PECC 서밋에서 광 네트워킹 장비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하겠다는 일련의 표준을 승인했다. 핵심 메시지는 단순하다. 제조·인터페이스·시험 관행을 공통화해, 시장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구현 방식의 차이를 없애고 공급망이 칸막이처럼 나뉘어 생산량을 제약하는 문제를 풀겠다는 것이다. 공개된 표준 문서에는 공동 패키징 광학(Co-Packaged Optics, CPO)의 시스템 아키텍처 개요와 권고 사례, 실리콘 포토닉스 시험 및 제조 규격, 4코어 멀티코어 광섬유 케이블·커넥터·광섬유 어레이 유닛 규격 등이 포함됐다.
공급난이라는 현실적 배경
표준화가 지금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달 초 루멘텀 홀딩스는 블룸버그에 자사 광 부품이 2029년까지 '완전 매진' 상태이며 2028년까지 일부 제품은 수요를 맞추지 못한다고 밝혔다. 루멘텀은 포토닉스에 필수적인 인듐 인화물(InP) 부품을 생산하는데, 이 소재의 주요 생산국이 중국이라는 점은 공급망에 지정학적 위험까지 더한다. 고사양 D램과 플래시 저장장치가 이미 겪고 있는 품귀와 가격 급등이 광 부품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는 셈이다. 참고로 루멘텀의 투자자에는 엔비디아가 포함돼 있으며, 젠슨 황 CEO는 이번 주 GTC에서 PCB와 트랜시버를 거치지 않고 데이터가 칩에서 광학으로 바로 들어가는 Spectrum X 기반 CPO 기술을 선보였다.
맥킨지도 이달 초 AI가 추론 중심으로 옮겨가는 가운데 네트워킹을 '개선이 필요한 영역'으로 꼽으며, 더 높은 대역폭 밀도와 비트당 더 낮은 전력을 위해 광학 통합 스위치(CPO)를 배치하라고 조언했다. 동시에 '개방형 인터커넥트'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특화 아키텍처는 대량 생산 단계에서만 비용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APC가 내세우는 '다중 소싱'과 '폭넓은 공급사 참여'라는 명분이 이 진단과 맞닿는 지점이다.
'필요 없는 트랜시버가 가장 친환경적'
주목할 만한 관점은 APC 워킹그룹에 참여한 포토닉스 개발사 리졸라이트에서 나왔다. 오페르 샤피로 CEO는 스케일업 환경에 두 기술이 함께 쓰인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네트워크를 재구성하는 느린 스위칭 방식의 광회선교환(OCS)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1000배 빠르게 동작하는 데이터 스위치다. 리졸라이트는 이번 표준을 자사의 나노초 단위 OCS 접근, 즉 데이터를 빛의 영역에 그대로 둔 채 네트워크로 전달하는 '네이티브 광자 라우팅'에 대한 지지로 해석한다. 광-전-광 변환을 반복하지 않으면 네트워크 에너지 효율이 크게 오르고, 멀티랙 AI 스케일업 네트워크에서 필요한 트랜시버 수를 극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샤피로의 표현을 빌리면 "가장 구하기 쉽고 가장 친환경적인 트랜시버는 필요하지 않은 트랜시버"다. 인듐 인화물 공급이 걱정이라면 어디서 더 구할지 고민하기보다 덜 쓰는 쪽이 합리적이라는 논리다. APC 역시 나노초급 OCS와 관련해 특정 구현을 표준화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빠르고 투명한 OCS가 개방형 AI 스케일업 패브릭의 '일급 구성요소'로 동작하도록 제어 평면·광 인터페이스·동작 프레임워크를 정의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혔다.
실무자가 눈여겨볼 지점과 한계
APC가 가장 경계하는 시나리오는 개방형 표준이 없을 때 시장이 수직 통합된 독점 솔루션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장이 파편화되고 고객의 종속 위험이 커지며 채택이 느려진다는 것이 CPO 관련 문서의 경고다. 인프라를 설계·조달하는 입장에서 이 표준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특정 벤더에 묶이지 않고 복수 공급사로부터 CPO·광섬유 부품을 조달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기대다.
다만 현 시점에서 과도한 낙관은 금물이다. 발표된 것은 어디까지나 규격과 '권고 사례(Recommended Practices)'이며, 실제 생산 수율이나 단가가 언제 어느 정도로 개선될지에 대한 구체적 수치는 제시되지 않았다. 루멘텀이 예고한 2029년까지의 공급 경색이 표준 하나로 즉시 완화되는 것도 아니다. 표준이 다중 소싱의 '가능성'을 연다는 것과, 충분한 생산 능력과 소재가 실제로 확보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결국 한국의 데이터센터·네트워크 담당자라면 CPO와 OCS를 둘러싼 개방형 생태계의 진행 상황을 추적하되, 인듐 인화물 같은 핵심 소재의 공급 리스크와 조달 다변화를 병행해 점검하는 현실적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