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지식 노동을 빠르게 재편하고 있지만, 인재 개발(HRD) 연구는 이 변화를 주로 조직 내부의 교육·훈련 과제로만 다뤄왔다. 개별 기업이 직원을 어떻게 재교육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사이, 정작 한 직군 전체가 다음 세대의 전문가를 어떻게 길러내고 전문성을 집단적으로 재생산하는가라는 질문은 사각지대에 남았다. arXiv에 공개된 개념 논문 'The Tragedy of the Cognitive Commons'는 바로 이 빈틈을 겨냥한다. 저자는 공유지 이론, HRD 연구, 분산 인지 개념을 엮어 '인지 공유지(Cognitive Commons)'라는 틀을 제안한다.
합리적 선택이 만드는 집단적 고갈
핵심 논지는 역설적이다. 개별 조직이나 개인이 AI를 도입하는 결정은 각자에게 지극히 합리적이지만, 그 합리적 선택들이 쌓이면 직군 전체가 갱신을 위해 의존하는 '공유된 전문성 풀'이 고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전적인 공유지의 비극과 구조가 같다. 목초지에 소를 한 마리 더 풀어놓는 것은 개별 목동에게 이득이지만, 모두가 그렇게 하면 목초지 자체가 망가진다. 여기서 목초지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한 전문직이 오랜 실무 경험을 통해 축적하고 후대에 물려주는 숙련의 총량이다.
논문은 숙련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하나는 '내재화된 숙련(Internalized Mastery)'으로, 지속적인 실무 반복을 통해 몸에 밴 깊은 도메인 지식이다. 다른 하나는 '분산된 숙련(Distributed Mastery)'으로, 인간과 AI가 결합된 시스템을 조율하고 지휘하는 능력이다. AI를 잘 쓰는 것과 실제로 그 분야를 깊이 아는 것은 다른 역량이라는 구분이다. 문제는 조직이 후자만으로 전자를 대체할 수 있다고 가정할 때 발생한다.
검증의 사슬(Validation Tether)
저자가 제시하는 개념 가운데 실무적으로 가장 날카로운 것은 '검증의 사슬(Validation Tether)'이다. AI의 산출물을 효과적으로 감독하고 검증하려면, 역설적이게도 AI 도입이 갉아먹을 수 있는 바로 그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초급자가 오랜 실무를 통해 스스로 판단력을 쌓는 과정을 AI가 건너뛰게 만들면, 시간이 지나 AI의 오류를 잡아낼 사람 자체가 줄어든다. 지금의 숙련자들이 AI를 잘 감독한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감독 역량이 어디에서 재생산되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는 것이다.
논문은 초기 노동시장 데이터와 임상 분야의 증거가 AI 노출도가 높은 부문에서 전문성 재생산 경로에 교란이 나타날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본다. 다만 저자는 이 신호를 과장하지 않는다. AI 도입 자체가 최근의 일이고, 가장 뚜렷한 신호는 모든 직군이 아니라 앞서가는 선도 부문에서 나온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즉 아직은 경고 신호이지 확정된 결론이 아니며, 직군에 따라 취약성의 정도가 크게 갈린다.
조직 최적화에서 집단적 관리로
논문은 직군의 취약성을 결정하는 다섯 가지 요인을 제시하고, 이에 대응하는 거버넌스가 조직 차원, 전문가 협회 차원, 그리고 정책 차원의 세 층위에서 형성될 수 있다고 본다. 어느 한 기업이 자기 인력을 잘 관리하는 것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한 회사가 신입 채용과 도제식 훈련을 줄여 비용을 아끼더라도, 그로 인한 전문가 공급 부족의 부담은 산업 전체가 나눠 지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IT·전문 서비스 실무자에게 이 틀이 던지는 함의는 분명하다. AI 도입의 생산성 효과를 측정할 때, 지금 당장의 산출물 품질만이 아니라 5년, 10년 뒤 그 일을 판단하고 감독할 인력이 어디서 자라나는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주니어 개발자나 초급 전문가가 실무 경험을 통해 성장하던 경로를 AI가 대신할 때, 조직은 단기 효율을 얻는 대신 미래의 검증 역량을 소진하고 있을 수 있다. 논문은 전문성 개발을 개별 조직의 최적화 문제가 아니라 직군 전체가 함께 돌봐야 할 '집단적 관리(collective stewardship)'의 대상으로 재정의하며, 이는 HRD 이론과 인력 정책 모두에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다만 이 연구가 실증이 아닌 개념 논문이라는 점, 그리고 근거가 아직 선도 부문에 집중돼 있다는 한계는 함께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