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이자 곧 아버지가 될 스티브 크라우스가 '내 아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계기는 뜻밖에도 1995년에 출간된 닐 포스트먼의 책 『교육의 종말(The End of Education)』이었다. 자신의 경제적 가치의 핵심이던 프로그래밍 능력이 AI 앞에서 갑자기 덜 중요해 보이는 순간, 그는 서른 해 전의 책에서 위안과 실마리를 동시에 찾았다. 이 글은 번역이 아니라, 그 성찰이 한국의 IT 실무자에게 던지는 질문을 풀어보려는 시도다.
기술이 학교를 끝낸다는 오래된 예언
크라우스가 먼저 짚는 것은 '이번에야말로 다르다'는 확신의 역사다. 토머스 에디슨은 1913년 뉴욕 드라마틱 미러에서 "10년 안에 교과서는 공립학교에서 쓸모없어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라디오가 교사를 대체하고, 교육이 '버튼을 누르는 일'이 될 거라던 당대의 시가 함께 인용된다. 크라우스 자신도 2013년 MOOC(온라인 공개강좌)가 교육을 뒤엎으리라 호기롭게 예측했다가 빗나간 전력이 있다. 라디오, 영화, 인터넷은 모두 학교를 끝내지 못했다. 오히려 기술자들이 학교의 생명력을 반복해서 과소평가하는 전통 자체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는 아이러니를 그는 담담히 인정한다.
이 지점에서 그는 나심 탈레브의 '린디 효과'를 끌어온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변화에 적응하는 반(反)취약성을 뜻한다는 논리다.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은 본래 성직자를 길러내기 위해 세워졌다. 13세기부터 500년간 '신'은 학교를 세우는 충분한 명분이었지만, 종교의 위상이 바뀐 뒤에도 학교는 살아남았다. 크라우스의 통찰은 여기서 날카로워진다. 어떤 제도가 스스로 내세우는 존재 이유(신을 영광되게 하는 것)와, 그것을 실제로 지탱하는 힘(기부금, 명성, 그리고 누군가 아이를 돌봐줘야 한다는 현실)은 다르다는 것이다. 후자는 입 밖에 내기 꺼려지지만 훨씬 더 질기다.
흔들리기 시작한 다리 하나
그는 교육을 여러 개의 다리가 받치는 탁자에 비유한다. 그 다리들 중 '생계를 꾸릴 능력'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심적이었는지는, 그 다리가 흔들리기 시작하고서야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한때 그는 교육의 목적을 한 단어로 '자원 활용력(resourceful)'이라 정의했다. 임의의 자원을 동원해 문제를 찾아내고 푸는 사람은 더 이상 학교가 필요 없다는 논리였다. 구글과 이메일,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쓰는 사람이 곧 교육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가 그리던 자원 활용력의 완성형이 바로 AI 에이전트의 도구 사용 루프에서 구현되고 말았다. 암기와 구전 전통을 듀이 십진분류법이 대체했듯, 자원 활용력도 그 길을 갈지 모른다고 그는 적는다.
생계 능력이 흔들리는 이유를 그는 '더 객관적인 좋음의 심판자'를 찾던 자신의 성향에서 찾는다. 교육이 스스로 만든 시험과 측정은 숨 막힐 수 있었고, 시장은 그 대안이었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는 대학 중퇴자였지만 시장이 그들을 '좋다'고 판정했고, 아인슈타인은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과학적 기여가 그의 출구였다. 그런데 최근 AI의 수학 영역 발전으로 이 두 가지 영광의 경로가 모두 위협받는다. AI가 우리의 기여 능력마저 가져간다면, 아이들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목적은 발명될 수 있다
포스트먼의 제안에서 크라우스가 위안을 얻은 대목은 그 내용 자체보다, 교육의 목적을 새로 만들어내고 옹호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포스트먼이 든 예로는 '우주선 지구호'(우리는 한배를 탔으니 서로와 지구를 돌보자), '미국적 실험'(미국이 무엇이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경이와 책임감의 회복), 그리고 '세계를 만드는 사람들'(우리를 다시 빚어낼 도구와 서사를 학생이 직접 만들게 하자)이 있다. 마셜 매클루언의 제자였던 포스트먼다운 세 번째 제안이다.
크라우스가 끝으로 기대는 것은 매클루언식 명제, '매체가 곧 메시지'다. 무엇을 가르치느냐보다 어떻게 가르치느냐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여기에 알피 콘의 교육관 — 학생을 대상이 아닌 인간으로 대하는 '함께 하기(doing with)' 대 '시키기(doing to)' — 가 겹쳐진다. 그래서 그가 내린 잠정적 결론은 겸손하다. 교육의 목적을 다 안다고 선언하는 대신, 아이와 함께 그 목적을 만들어가자는 것. 정답을 쥐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답을 모른다는 사실을 공유하며 함께 빚어가는 방식 자체가 가장 정직하고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제안이다.
한국의 개발자와 교육 실무자에게 이 글이 주는 쓸모는 '그래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정답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나오는 '교육 종말론'을 역사적 데이터로 교정해주는 데 있다. 코딩 교육의 가치를 재배치해야 한다는 압박은 실재하지만, 그 압박이 곧 학교나 가르침 자체의 소멸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글은 어디까지나 한 개인의 독서 기록이자 에세이이며, 구체적 커리큘럼이나 검증된 정책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는 한계도 분명하다. 흔들리는 다리를 어떻게 다시 세울지는, 글쓴이의 표현을 빌리면 결국 당사자들이 함께 궁리할 몫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