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이면 비욘드룸(beyondloom)이 만든 창작 도구 데커(Decker)의 지난 1년을 정리하는 글이 올라온다. 올해는 1.61에서 1.71 릴리스 사이의 변화가 대상이다. 데커는 1980~90년대 하이퍼카드(HyperCard)를 떠올리게 하는 '덱(deck)' 기반 멀티미디어 저작 도구로, 비프로그래머도 카드를 넘기듯 인터랙티브 문서·게임·전자잡지를 만들 수 있게 해 준다. 자체 스크립트 언어 Lil을 내장하고 있어 단순한 그림판을 넘어 작은 애플리케이션 수준의 작업까지 가능하다. 이번 업데이트는 게임 제작 지원, 저장 효율, 스크립트 언어의 안정화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정리된다.
게임패드와 이미지 압축
가장 눈에 띄는 기능은 게임패드 입력 지원이다. 사용 가능한 경우 키보드로도 대체되며, 아케이드·액션 장르를 만들려는 사용자층을 겨냥한 변화다. 기본 예제인 소코반이 게임패드와 키보드로 플레이 가능해졌고, 대화창 모듈인 다이얼로가이저(dialogizer)는 이를 사용하는 게임에 키보드로 대사 진행과 선택지 조작을 자동으로 추가한다. 또한 새로 생긴 app.cursor 필드를 활용해 '동기(synchronous)' 스크립트 상황에서도 일반 버튼의 마우스 오버 동작을 흉내 낸다. 다만 저자 스스로 밝혔듯 이 기능을 제대로 보여 줄 예제와 라이브러리는 아직 더 채워져야 하는 단계다.
사용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체감되는 개선은 이미지 압축이다. 초기 데커는 단순함을 위해 비트 패킹과 런랭스 인코딩(RLE)에 의존했지만, 데이터블록 형식 자체는 더 나은 코덱을 받아들일 여지를 남겨 두고 있었다. 새 IMG3 인코더는 데커의 GIF 코덱과 같은 LZW 기반 내부 구조를 공유하며, 특히 디더링된 컬러 그래픽을 많이 쓰는 덱에서 전체 파일 크기를 2~4배가량 줄인다. 새 코덱이 유리하지 않은 경우에는 기존 IMG0~IMG2가 선택되므로 손해가 없다. 전자잡지 저자 입장에서는 같은 '플로피 한 장'에 훨씬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게 된 셈이다.
저작 경험과 스크립트 언어 다듬기
저작 편의 개선도 여럿이다. 위젯 전반에 .pattern 속성이 추가되어 .show, .font와 조합해 외형을 제어하고, 메뉴나 오른쪽 툴바의 스와치 클릭으로 빠르게 바꿀 수 있다. 서식 있는 텍스트의 패턴·색상도 같은 방식으로 조정된다. 또 컨트랩션(contraption) 설정 UI에 'data'와 'note'라는 속성 유형이 생겨, 전자는 Lil 필드로 구조화된 값을 노출하고 후자는 편집기 대신 설명문을 보여 줘 자기 문서화를 돕는다. 축소된 캔버스에 이미지를 붙여 넣을 때 잘림을 막기 위해 '논리적 크기'를 조정하거나, 클립보드 이미지를 어느 편집 모드에서든 새 캔버스 위젯으로 붙여 넣는 등 세부 동작도 손봤다.
스크립트 언어 Lil은 '안정화를 향해 식어 가는' 중이라고 표현되지만 몇 가지 의미 있는 교정이 있었다. 비교 연산자 < 와 >는 두 인자가 숫자면 수치 비교, 문자열이면 사전식 비교를 한다. 기존에는 타입이 섞이면 둘 다 문자열로 해석하려 했는데, 필드에 숫자를 저장하고 .data가 아닌 .text를 실수로 참조하는 흔한 상황에서 혼란스러운 결과를 냈다. 이제는 한쪽이라도 숫자면 수치 해석을 우선하여 | (최대), & (최소) 연산자와 일관되게 동작한다. 아울러 table 연산자가 nil을 빈 리스트·빈 딕셔너리로 받아들이도록 조정됐고, raze 연산자는 단일 원소를 원자로 뭉개지 않고 리스트로 유지하도록 바뀌었다.
새 단항 연산자도 네 개 추가됐다. trim(공백 제거), ceil(올림, floor의 짝), rev(역순, K의 |:에 해당), distinct(중복 제거, K의 ?:에 해당)이다. trim은 파서에서 접두사를 떼어낼 때 불필요한 문자열 복사를 피하고, distinct는 in처럼 내부 해시셋을 쓰므로 적절히 쓰면 성능에 큰 도움이 된다. 비트 조작을 위한 Bits 인터페이스에는 숫자를 이진 자릿수 리스트로 풀거나 되감는 .decode[]·.encode[]가 생겼고, KeyStore 인터페이스는 keystore[] 함수로 직접 만들어 가변 '딕셔너리 빌더'처럼 쓸 수 있게 일반화됐다. 모듈 직렬화 용도를 넘어 dict로 통째로 만들기 번거로운 상황을 메우는 장치다.
생태계와 'AI 없는' 노선
기능만큼 흥미로운 건 커뮤니티다. 데크-먼스 3, 데커 판타지 캠프 2026 같은 공식 잼 외에도 여러 이벤트가 열렸고, itch.io에만 113개 이상의 새 덱이 쏟아졌다. #decker 태그가 붙은 게임은 지난해 213개에서 353개로, 책·만화까지 합치면 474개로 늘었다. 데커로 데커용 도구를 만드는 사례(비트맵 폰트 임포터, 16x16 아이콘 전용 드로잉 도구 minart 등)와 초보자용 멀티미디어 가이드 'Phinxel's Phield Notes', 그리고 데커 기반 최초의 스팀 출시작 'The Dreams in the Peacock House'까지 폭이 넓다.
저자는 글 말미에서 분명한 입장을 밝힌다. 데커는 LLM이나 생성형 AI 도구의 도움 없이 개발됐으며 앞으로도 그럴 의도가 없다는 것이다. 주요 외부 의존성인 SDL이 AI 기여를 금지하는 정책을 둔 점을 근거로 들며, 'AI 산출물(slop)'이 섞인 의존성은 피하거나 점진적으로 교체하겠다고 했다. 창작 커뮤니티를 겨냥한 공급망 공격에 대한 경계이자, 창작자가 생계를 위해 AI 결과물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는 선언이다. 한국의 실무자 관점에서 데커는 당장 업무 스택에 올릴 도구는 아니지만, 소규모 상호작용 콘텐츠를 가볍게 시제품화하거나 레트로풍 교육·전시물을 만들 때 참고할 만하다. 동시에 의존성 투명성과 AI 정책을 제품 정체성으로 내세우는 방식은, 오픈소스 신뢰 문제를 고민하는 팀에게 하나의 사례로 읽힌다. 다음 공식 잼 '데크-먼스 4'는 2026년 12월로 예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