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로를 만든다고 하면 보통 사람이 모든 게이트와 배선을 하나하나 정해주는 그림을 떠올리죠. 그런데 씨앗과 성장 규칙만 심어주면 회로가 생물처럼 스스로 자라난다면 어떨까요? MorphoHDL은 정확히 이 발상을 실험하는 미니멀한 언어예요. 구글의 Paradigms of Intelligence 팀 쪽에서 나온 프로젝트인데, 하드웨어 설계의 기본 전제를 뒤집는 시도라서 개념 자체가 흥미롭거든요.
먼저, HDL이 뭐냐면
HDL은 하드웨어 기술 언어(Hardware Description Language)의 약자예요. Verilog나 VHDL이 대표적인데, 쉽게 말해 회로의 동작을 코드로 적는 언어예요. '이 신호가 들어오면 저 값을 내보내라'는 식으로 작성하면, 합성 도구가 그 코드를 실제 논리 게이트들의 배치와 연결로 바꿔주죠. 소프트웨어 개발자에게 컴파일러가 있다면 하드웨어 개발자에게는 합성 도구가 있는 셈이에요. 중요한 건 이 방식이 철저하게 톱다운이라는 점이에요. 사람이 전체 구조를 먼저 정하고, 도구는 그걸 최적화할 뿐이죠.
생물은 정반대로 만들어요
그런데 자연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훨씬 복잡한 걸 만들어요. 사람 몸은 약 37조 개의 세포로 이뤄져 있는데, 그 설계도인 DNA는 정보량으로 치면 몇 GB밖에 안 되거든요. 어떻게 가능하냐면, DNA는 완성된 몸의 도면이 아니라 '성장하는 방법'을 담은 레시피이기 때문이에요. 각 세포는 전체 그림을 전혀 모르고, 그저 이웃 세포와 주고받는 신호에 따라 분열하고 분화하는 로컬 규칙만 따라요. 그런데 그 단순한 규칙들이 모여서 눈, 심장, 뇌 같은 정교한 전체 구조가 창발하죠. 이런 과정을 형태발생(morphogenesis)이라고 부르는데, MorphoHDL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온 거예요. 완성된 회로를 기술하는 대신, 회로가 자라나는 규칙을 기술하는 언어인 거죠.
왜 이런 걸 하냐면
이 접근에는 몇 가지 매력적인 가능성이 있어요. 첫째는 압축이에요. 거대한 반복 구조를 작은 성장 규칙 몇 개로 표현할 수 있거든요. 둘째는 자기 복구예요. 생물이 상처를 재생하듯, 성장 규칙을 가진 회로는 일부가 손상돼도 스스로 다시 자라날 여지가 생겨요. 셋째는 확장성인데, 같은 규칙으로 더 큰 공간에서 키우면 더 큰 회로가 나올 수 있다는 거죠. 참고로 이 팀은 신경 세포 자동자(Neural Cellular Automata) 연구로 유명해요. 픽셀 하나하나가 이웃만 보는 작은 신경망인데, 이들이 상호작용하면서 도마뱀 그림이 스스로 자라나고, 일부를 잘라내도 원래 모습으로 재생되는 데모를 보여줬거든요. MorphoHDL은 그 아이디어를 이미지에서 회로라는 실용 영역으로 가져온 연장선으로 볼 수 있어요.
업계 맥락에서 보면
사실 '설계하지 않고 만들어지게 한다'는 시도에는 역사가 있어요. 1996년 에이드리언 톰슨이라는 연구자가 유전 알고리즘으로 FPGA(프로그래밍 가능한 칩) 회로를 진화시켰는데, 완성된 회로가 이론상 연결되지도 않은 게이트들의 미세한 물리적 간섭까지 활용하고 있어서 연구자들이 어리둥절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죠. 요즘 주류 반도체 설계 자동화는 강화학습으로 칩 배치를 최적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사람의 설계를 도와주는 쪽이에요. 성장 규칙에서 구조가 창발하게 하는 MorphoHDL은 그보다 훨씬 급진적인 패러다임인 거죠.
한국 개발자에게 주는 시사점
솔직히 말하면 당장 실무에 쓸 기술은 아니에요. 하지만 '전역 통제 없이 로컬 규칙만으로 전체 구조를 만든다'는 사고방식 자체는 배워둘 가치가 커요. 분산 시스템에서 각 노드가 이웃 정보만으로 동작하는데 전체가 일관된 상태로 수렴하는 gossip 프로토콜이나 CRDT 같은 기술과 근본적으로 같은 철학이거든요. 중앙 조율자 없이 견고한 시스템을 만드는 힌트를 생물학에서 얻는 셈이죠.
정리하면, MorphoHDL은 '설계'에서 '재배'로 관점을 바꾸는 실험이에요. 여러분이 다루는 시스템 중에 중앙 통제를 걷어내고 로컬 규칙만으로 굴러가게 만들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디일 것 같나요?
🔗 출처: Hacker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