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숯덩이가 된 두루마리, 그 안의 글자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폼페이와 함께 근처 도시 헤르쿨라네움도 화산재에 묻혔어요. 18세기에 이곳을 발굴하다가 한 대저택에서 천 개가 넘는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나왔는데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장인이 주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돼서 '파피루스 저택'이라고 불리는 곳이에요. 문제는 이 두루마리들이 뜨거운 화산 쇄설물에 타서 숯덩이처럼 굳어버렸다는 거예요. 억지로 펼치면 부서지고, 실제로 과거에 펼치려다 망가진 것도 많아요.
PHerc.은 헤르쿨라네움 파피루스에 붙이는 일련번호예요. 이번 소식은 PHerc. 306B라는 번호의 두루마리 안에서 처음으로 글씨가 확인됐다는 거예요. 물리적으로는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채로 2000년 만에 처음 안쪽 글자를 '본' 거죠. 디지털로 읽히기 시작한 두루마리 목록에 하나가 더 늘어난 셈이에요. 글자가 얼마나 많이, 얼마나 선명하게 보였는지는 원문 게시글의 이미지로 직접 확인해 보길 추천해요.
펼치지 않고 읽는 법: 4단계 파이프라인
이 작업은 베수비오 챌린지(Vesuvius Challenge)라는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어요. 과정을 단계별로 보면 이래요.
1단계, 스캔. 싱크로트론이라는 입자가속기 기반의 초강력 X선 광원으로 두루마리를 마이크로 CT 촬영해요. 원리는 병원 CT와 비슷한데, 마이크로미터 단위로 훨씬 세밀하게 찍어요. 결과물은 두루마리 내부를 통째로 담은 3D 볼륨 데이터이고, 크기가 테라바이트급이에요.
2단계, 세그멘테이션(가상 펼치기). 돌돌 말리고 찌그러진 파피루스 한 장의 표면을 3D 데이터 속에서 따라가는 작업이에요. 롤케이크 단면에서 얇은 크림층 하나를 끊기지 않게 끝까지 따라간다고 상상해 보세요. 층과 층이 거의 붙어 있고 군데군데 눌려 있어서 가장 어렵고 손이 많이 가는 단계예요. 처음에는 켄터키대 브렌트 실스(Brent Seales) 교수 연구실의 Volume Cartographer 같은 도구로 사람이 일일이 표면을 찍어 나갔어요. 이후 ThaumatoAnakalyptor 같은 자동화 도구가 나오면서 속도가 붙었고요.
3단계, 평탄화. 추적한 3D 곡면을 2D 평면 이미지로 쭉 펴요.
4단계, 잉크 검출. 여기가 가장 큰 난관이에요. 헤르쿨라네움 두루마리의 잉크는 탄소로 만들어져서 탄화된 파피루스와 X선 밀도가 거의 같거든요. 그래서 CT 이미지에서는 그냥 안 보여요. 해법은 머신러닝이었어요. 잉크가 묻은 자리에 남은 미세한 표면 질감(갈라진 균열 무늬 같은 것)을 모델이 학습해서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 글자를 찾아내는 거죠.
이 방식으로 2023년 대회에서는 학생 세 명으로 이뤄진 팀이 한 두루마리에서 2,000자가 넘는 글을 읽어내 그랜드 프라이즈를 받았어요. 2025년에는 옥스퍼드 보들리안 도서관이 소장한 PHerc. 172에서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자 필로데모스의 저작 『악덕에 관하여』라는 제목까지 확인됐고요.
왜 '두루마리 하나 더'가 뉴스일까
두루마리마다 상태가 제각각이기 때문이에요. 말린 정도, 눌린 모양, 스캔 조건, 남아 있는 잉크 상태가 다 달라요. 그래서 한 두루마리로 학습한 모델이 다른 두루마리에서는 잘 안 통하는 경우가 많아요. 머신러닝에서는 이걸 도메인 시프트라고 불러요. 쉽게 말해 연습 문제와 실전 문제가 너무 달라서 성적이 떨어지는 현상이에요.
그러니 새 두루마리에서 글자가 보였다는 건 파이프라인이 특정 두루마리 하나에만 맞춰진 게 아니라 점점 일반화되고 있다는 신호예요. 최종 목표는 아직 열어보지 못한 수백 개의 두루마리를 대규모로, 자동으로 읽어내는 거고요.
업계 맥락: 오픈 사이언스 대회 모델
베수비오 챌린지는 냇 프리드먼, 대니얼 그로스 같은 기술 투자자들이 상금을 후원하고, 스캔 데이터와 코드를 공개해 전 세계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만든 대회예요. 2023년에는 Kaggle에서 잉크 검출 대회도 열렸어요. 연구실 하나가 10년 걸릴 일을 전 세계 개발자들이 나눠 맡아 몇 년 만에 해내고 있는 거죠. 구글 딥마인드의 Ithaca가 훼손된 고대 그리스 비문의 빠진 글자를 '텍스트 수준'에서 복원했다면, 베수비오 챌린지는 보이지 않는 글자를 '이미지 수준'에서 읽어내요. 그래서 두 접근은 서로 보완적이에요.
한국 개발자에게는
고대 그리스어를 몰라도 기여할 수 있다는 게 이 프로젝트의 매력이에요. 필요한 건 컴퓨터 비전, 3D 데이터 처리, 대용량 데이터 엔지니어링 역량이거든요. 테라바이트급 볼륨을 다루려면 zarr 같은 청크 기반 포맷으로 필요한 부분만 불러오는 기술이 필수인데, 이건 어떤 대용량 데이터 업무에서도 통하는 스킬이에요.
이 기술은 의료영상 분할이나 배터리·반도체의 비파괴 CT 검사와도 구조가 아주 닮았어요. 국내 제조업과도 바로 연결되는 영역이죠. 우리나라에도 판독하기 어려운 고문서와 문화유산이 많으니, 비슷한 접근을 국내 기록물에 적용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도전이 될 거예요.
마무리
한 줄 정리: PHerc. 306B에서 확인된 첫 글씨는 '펼치지 않고 읽는' 기술이 한두 번의 성공을 넘어 여러 두루마리로 확장되고 있다는 증거예요.
여러분이라면 이런 AI 기반 해독 기술을 어떤 데이터에 적용해 보고 싶나요? 그리고 기업이나 연구실 대신 오픈 커뮤니티 대회 방식으로 하면 과학 연구가 더 빨라진다고 생각하시나요?
🔗 출처: Hacker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