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이탈리아 북부 파르마에서 농사를 짓던 마흔 살의 클라우디오 그로시는 다락방을 치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씨앗이 가득 담긴 낡은 자루를 발견했다. 1915년 무렵 농장을 일군 증조부가 남긴 것이었다. 물도 흙도 햇빛도 없이 얼마나 오래 방치됐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마르고 갈라진 알곡이라 그는 싹이 날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고, 거름 더미에 쏟아둔 채 잊어버렸다.
그런데 얼마 뒤 그 씨앗에서 여러 종류의 밀이 돋아났다. 그중 하나는 유독 눈에 띄었다. 키가 약 1.8미터로 상업용 밀의 두 배에 달했고, 줄기 끝에 이삭이 하나만 달리는 보통 밀과 달리 긴 이삭 하나를 여섯 개의 짧은 이삭이 손가락처럼 둘러싼 형태로 모두 일곱 개의 이삭을 맺었다. 알곡도 더 컸으며 노랑·검정·빨강·흰색·초록이 한 줄기에 섞여 나기도 했다. 농사만 지어온 그조차 본 적 없는 모습이었고 농업 서적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교회에서 성경 창세기의 '한 줄기에 일곱 이삭' 구절을 접하고는, 이 작물이 아주 오래된 품종일 것이라 직감했다. 그는 이를 '그라노 델 미라콜로(기적의 밀)'라 불렀다.
수확량 경쟁이 지운 품종들
밀 재배는 약 1만 년 전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시작됐고, 당시의 고대 밀은 지금보다 훨씬 키가 컸다. 인구가 늘면서 사람들은 수확량이 많은 품종을 선호해 왔고, 20세기의 격변 속에서 그 흐름은 가속됐다.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밀의 약 3분의 1을 수입하던 이탈리아에서 1922년 집권한 무솔리니는 '외국 빵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자'며 다수확 '엘리트' 품종을 보급하는 '밀의 전투(la Battaglia del Grano)'를 벌였고, 이는 세계적 농업 개발 모델이 됐다. 미국에서는 1930년대 초 가뭄과 지력 고갈로 대평원이 사막으로 변한 더스트볼이 닥쳤다.
이후 노먼 볼로그가 이끈 '녹색 혁명'은 선발 육종으로 생산량을 크게 끌어올려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렸다. 그러나 키가 작아진 품종은 잡초와의 경쟁에 약하고 병해에 취약해 제초제·살균제·비료에 의존해야 했고, 이런 관행은 토양의 건강을 해치며 밀을 기후 변화와 극한 기상에 더 취약하게 만들었다. 그로시가 되살린 밀은 정반대였다. 가뭄에 강하고 키가 커 잡초를 눌렀으며 비료나 제초제 없이도 자랐다.
과학으로 확인된 특성과 남은 한계
문제는 빵이었다. 이 밀로 만든 반죽은 부풀었다가 주저앉았다. 2000년대 초 그로시는 손 반죽을 고수하던 동네의 노(老)제빵사와 함께 실험을 거듭해, 작은 단위로 키 큰 바구니에서 발효시키고 반죽을 적게 치댈수록 잘 부푼다는 점을 알아냈다. 파르마 대학 식품과학도 베니아미노 페로벨리는 농민 장터에서 이 빵을 맛본 뒤 영양가를 학부 논문 주제로 삼았고, 테오필로 바메랄리 교수 연구실과 함께 이 작물이 라틴어로 '부푼 밀'을 뜻하는 트리티쿰 투르기둠(영어로 풀라드 밀)임을 밝혔다. 튀르키예와 이집트 등 지중해권에서 유래해 이탈리아에서도 재배되다 다수확 품종에 밀려난 품종으로, 다락방 자루는 증조부가 전통 종자를 갈무리해 둔 덕에 살아남은 셈이었다. 분석 결과 현대 밀보다 인과 철이 풍부하고 글루텐은 적었으며, 라이신·트립토판 같은 필수 아미노산과 아르기닌이 많았다.
고대 품종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큰 키는 약점이기도 해서, 강풍·비·우박에 줄기가 쓰러지면 수확을 망친다. 무솔리니 시대에 외면받은 이유도 여기 있었을 것이다. 그로시는 키 작은 밀과 함께 심어 지지대 역할을 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비켜 갔다. 수확한 밀가루는 지역 유기농 업체 몰리노 그라시를 통해 장인 제빵사와 식당, 그리고 해외 소비자에게까지 공급됐다.
이 이야기가 농업을 넘어 시사하는 바는 품종 다양성이다. 팔레르모 대학의 농생태계 생물다양성 전문가 프란체스코 소틸레는 소수의 재배 품종에만 의존하면 장기 가뭄, 폭염, 새로운 병해충 앞에서 인류 전체가 취약해진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그의 근거지 시칠리아는 2024년 최근 35~40년 사이 최악의 가뭄을 겪어 많은 상업 재배 농가가 그해 4월 밭을 포기했지만, 전통 품종을 기른 소규모 농가 상당수는 수확에 성공했다. 단일 효율에 최적화된 시스템이 외부 충격에 얼마나 약한지, 그리고 '비효율적'으로 보이던 다양성과 보존이 왜 회복력의 원천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쓰임이 끝났다고 버린 옛 자산이 뜻밖의 위기에서 해답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종자뿐 아니라 레거시를 다루는 모든 분야가 새겨둘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