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초창기부터 끈질기게 회자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소프트웨어 기업 오토데스크(Autodesk)가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라는 단어를 상표로 등록하려 하자, 이 용어를 소설에서 처음 대중화한 작가 윌리엄 깁슨이 보복으로 오토데스크 연구원 '에릭 굴리센(Eric Gullichsen)'이라는 이름 자체를 상표 등록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굴리센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앞부분은 사실이고 뒷부분은 심리학자이자 희대의 장난꾼 티머시 리어리가 퍼뜨린 농담이었다.
386 PC로 돌아간 초기 VR 실험실
이야기의 배경은 1989년 오토데스크 리서치 랩이다. 연구진은 NASA 에임스의 스콧 피셔를 방문한 뒤 가상현실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당시 시스템은 지금 기준으로는 소박했다. ISA 버스에 매트록스 그래픽 카드 두 장을 꽂은 386 PC에 VPL의 아이폰(EyePhone) 헤드셋, 폴히무스 트래커, 데이터 글러브를 연결한 구성이었다. 수백 개 폴리곤짜리 모델을 초당 6~10프레임으로 겨우 그려냈다. 느렸지만 '거울 나라로 넘어가기'에는 아슬아슬하게 충분했고, 연구실의 모토는 "이제 현실만으로는 부족하다(Reality Isn't Enough Any More)"였다. 불과 서른 몇 해 전 산업용 VR의 출발선이 이 정도 사양이었다는 사실은, 오늘의 실무자에게 기술 성숙 속도를 가늠하는 하나의 좌표가 된다.
이 실험실에는 티머시 리어리가 자주 드나들었다. 굴리센은 1986년 해커스 2.0 콘퍼런스에서 리어리를 처음 만나 산호세 공항까지 태워주며 가까워졌고, 리어리의 권유로 MCC를 그만두고 캘리포니아로 옮겨 왔다. 깁슨의 열렬한 독자였던 리어리는 1984년작 소설 『뉴로맨서』가 다가올 디지털 혁명을 놀랍도록 정확히 예견했다고 평가했고, 오토데스크 VR 랩에 '사이베리아(Cyberia)'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상표 출원, 그리고 "오토데스크는 거리가 아니다"
VR 기술이 제품화에 가까워지자 오토데스크는 '사이버스페이스'를 상표로 출원했다. 리어리를 통해 깁슨이 상당히 불쾌해한다는 말을 전해 들은 굴리센은 화해의 뜻을 담은 편지를 보냈는데, 마지막에 깁슨 자신의 문장 "거리는 사물의 쓰임새를 스스로 찾아낸다(The street finds its own use for things)"를 비꼬듯 인용하며 끝맺었다. 깁슨은 변호사를 통해 오토데스크에 공식 서한을 보냈고, 회사는 그것을 무시했다고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설이 태어났다. 장난기를 참지 못한 리어리가 '깁슨이 보복으로 에릭 굴리센이라는 이름을 상표 등록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존 페리 바로가 여기에 살을 붙였으며, 작가 루디 러커가 이를 더 널리 증폭시켰다.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나중에는 웹을 타고 '정설'로 굳어진 셈이다.
약 1년 뒤 굴리센은 이미 오토데스크를 떠나 자신의 VR 스타트업 센스에이트(Sense8)를 세운 상태였고, 1990년 바르셀로나에서 처음 열린 아트 푸투라에 초청받았다. 그는 한 고급 호텔 로비에서 깁슨과 마주쳤다. 깁슨은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거리는 사물의 쓰임새를 스스로 찾아낸다지만, 오토데스크는 거리가 아니다"라고 받아쳤다. 그러나 밤새 카바를 마시고 수많은 파티를 거치며 둘은 그 문제를 사실상 묻어두었다. 가우디의 구엘 공원 방문도 기억에 남았는데, 그곳의 거대한 세라믹 도마뱀은 깁슨의 소설 『카운트 제로』에 등장한다.
실무자가 가져갈 것
이 일화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일반 명사이자 문화적 상징이 된 단어를 한 기업이 상표로 독점하려 할 때 벌어지는 마찰이다. 제품 네이밍과 브랜드 보호를 다루는 실무자라면, 이미 공공 담론에 깊이 뿌리내린 용어를 전유하려는 시도가 법적 분쟁 이전에 평판과 커뮤니티의 반발을 부른다는 점을 곱씹을 만하다. 깁슨의 "오토데스크는 거리가 아니다"라는 한마디는 그 긴장을 압축한다.
다른 하나는 정보의 출처 검증이다. 한 사람의 농담이 유력 인물들의 가필을 거쳐 반복되면,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도 '알려진 역사'로 자리 잡는다. 오늘날 AI가 생성한 그럴듯한 서술과 출처 불명의 정보가 빠르게 퍼지는 환경에서, 당사자의 직접 증언만이 오래된 전설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반복되는 서사일수록 원출처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오래됐지만 여전히 유효한 교훈이다. 다만 이 기록은 굴리센 한 사람의 회고에 기댄 것이어서, 당시 서한의 구체적 문구나 상표 출원의 법적 처리 결과까지 교차 검증된 것은 아니라는 한계도 함께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