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광펜에 '집착'이라니, 무슨 말이죠?
여러분, 형광펜으로 줄 긋다가 이런 경험 한 번쯤 있으시죠? 힘을 살짝 세게 줬더니 펜촉이 눌리면서 잉크가 왈칵 번지고, 종이 뒷면까지 비쳐버리는 거요. 반대로 살살 그으면 줄이 끊기고 색이 흐릿하게 나오고요. 일본 문구회사 파일럿(Pilot)이 바로 이 '별것 아닌' 문제 하나에 제대로 꽂혔습니다. 그렇게 나온 게 '키레나(Kire-Na)'라는 형광펜인데요. 이름부터가 일본어로 '깨끗한, 깔끔한'이라는 뜻이에요.
디자인 전문 매체에서 이 펜을 두고 "UX에 대한 집착"이라고 표현했어요. 펜 한 자루 이야기 같지만, 사실 우리 개발자들이 매일 고민하는 사용자 경험(UX) 이야기와 정확히 똑같은 결입니다.
어떻게 만들었길래?
핵심은 '필압 자동조절'이에요. 필압이 뭐냐면, 펜으로 누르는 힘이에요. 보통 형광펜은 펜촉(felt tip, 펠트 재질로 된 끝부분)이 종이에 닿는 압력에 따라 잉크가 나오는 양이 들쭉날쭉해지거든요. 세게 누르면 펠트가 찌그러지면서 종이에 닿는 면적이 넓어지고, 그만큼 잉크가 한꺼번에 많이 나와서 번지는 거예요.
키레나는 펜촉 안쪽에 작은 완충 구조(스프링 같은 쿠션)를 넣어서, 사용자가 아무리 세게 눌러도 일정 압력 이상은 펜이 알아서 흡수해버립니다. 그러니까 손에 힘을 빡 줘서 긋든, 살살 긋든, 실제로 종이에 닿는 압력은 늘 비슷하게 유지되는 거죠. 결과적으로 누가 그어도 똑같이 깔끔한 선이 나옵니다.
여기서 진짜 중요한 포인트는요, 이 회사가 사용자에게 "적당히 누르세요"라고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대신 제품 스스로가 사용자의 들쭉날쭉한 힘 조절을 알아서 받아내도록 설계했죠. 사용 설명서로 해결할 문제를 하드웨어 구조로 풀어버린 거예요.
이게 왜 UX의 정석이냐면
좋은 UX의 핵심 원칙 중 하나가 "사용자에게 정확함을 요구하지 말고, 제품이 사용자의 흔들림을 흡수하라"는 거예요. 이걸 '관용적인 디자인(forgiving design)'이라고 불러요.
소프트웨어로 치면 이런 거예요. 회원가입 폼에서 전화번호를 받을 때, "하이픈(-) 빼고 숫자만 입력하세요"라고 사용자에게 규칙을 강요하는 앱이 있고, 사용자가 010-1234-5678로 넣든 01012345678로 넣든 알아서 정리해서 받아주는 앱이 있잖아요. 당연히 후자가 훨씬 기분 좋은 경험이죠. 키레나 형광펜이 딱 이 후자예요.
일본 문구 업계라는 맥락
사실 이건 파일럿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일본의 문구 회사들(파일럿, 미쓰비시 유니, 제브라, 펜텔 같은)은 이런 '미세한 디테일'을 가지고 수십 년째 경쟁하고 있어요. 0.01mm 단위로 펜촉을 깎고, 잉크가 마르는 속도를 조절하고, 손에 쥐었을 때의 무게중심까지 따지죠. 작은 개선을 끝없이 쌓아 올리는 '카이젠(개선)' 문화가 제품에 그대로 녹아 있는 거예요. 소프트웨어로 치면, 화려한 신기능보다 매 릴리스마다 사용자의 마찰을 1%씩 줄여나가는 팀과 비슷해요.
한국 개발자에게 주는 힌트
우리가 기능을 만들 때 자꾸 사용자에게 "이렇게 써주세요"라고 안내 문구를 붙이고 싶어지거든요. 근데 안내 문구가 늘어난다는 건, 사실 제품이 그만큼 사용자의 다양성을 못 받아내고 있다는 신호일 때가 많아요. 정말 좋은 설계는 안내가 필요 없을 만큼 알아서 동작하는 거죠.
API를 설계할 때도 똑같아요. 입력값을 빡빡하게 받아서 형식이 조금만 틀려도 에러를 뱉는 API보다, 합리적인 범위 안에서 유연하게 받아주는 API가 쓰는 입장에선 훨씬 편하잖아요. 형광펜 회사가 펜촉 안에 쿠션을 넣은 것처럼, 우리 코드 안에도 '사용자의 힘 조절을 받아내는 쿠션'을 넣을 수 있는지 한번 들여다볼 만합니다.
마무리
별것 아닌 형광펜 하나에도 "사용자가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되게" 만들겠다는 집착이 들어가 있다는 게 참 인상적이에요. 결국 좋은 UX는 화려한 기능이 아니라 이런 디테일에서 갈리는 것 같아요.
여러분이 만든 제품이나 코드 중에, 사용자에게 "이렇게 써주세요"라고 부탁하고 있는 부분은 없나요? 그 부담을 제품이 대신 받아내도록 바꾼다면, 어디부터 손대고 싶으세요?
🔗 출처: Hacker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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