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자를 모르던 사람이 문자를 만들다
1820년대 미국, 체로키족의 한 은세공인이 있었어요. 이름은 세쿼야(Sequoyah). 그는 영어를 읽지도 쓰지도 못했고, 사실 어떤 문자도 다룰 줄 몰랐어요. 그런데 백인들이 종이에 기호를 적어 '말을 멀리 보내는' 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대요. '우리 체로키 말도 이렇게 적을 수 있지 않을까?'
처음엔 단어 하나하나에 그림 기호를 붙이려 했어요. 그런데 단어가 너무 많아서 금방 한계에 부딪혔죠. 한자처럼 글자가 수천, 수만 개가 되어버리니까요. 여기서 세쿼야가 천재적인 전환을 해요. 단어가 아니라 '소리'에 주목한 거예요.
음절을 단위로 삼은 영리한 설계
세쿼야가 만든 건 '음절문자(syllabary)'예요. 이게 뭐냐면, 알파벳처럼 자음·모음을 따로 쪼개는 게 아니라 '가, 나, 다'처럼 하나의 소리 덩어리(음절)를 통째로 하나의 기호로 표현하는 방식이에요. 체로키어를 가만히 분석해보니 실제로 쓰이는 음절이 약 85개뿐이더라는 거죠. 그래서 그는 85개 안팎의 기호만 만들면 됐어요. 수만 개의 단어 기호 대신 85개라니, 엄청난 압축이죠.
재밌는 건 그가 영어 알파벳을 곁눈질해서 일부 글자 모양을 빌려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소리는 전혀 달라요. 예를 들어 영어 'D'처럼 생긴 글자가 체로키에선 완전히 다른 소리를 내는 식이에요. 모양만 빌리고 의미는 새로 부여한 거죠. 일종의 '재활용'인데, 오히려 글자를 모르던 사람이었기에 기존 알파벳의 발음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었던 거예요.
결과는 정말 놀라웠어요
이 문자가 퍼지는 속도가 어마어마했어요. 알파벳은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는 규칙을 따로 배워야 하지만, 음절문자는 '이 기호 = 이 소리'만 외우면 끝이거든요. 진입 장벽이 확 낮은 거죠. 체로키 사람들은 불과 몇 년 만에 대거 글을 읽고 쓰게 됐고, 1828년엔 체로키어 신문 '체로키 피닉스(Cherokee Phoenix)'까지 발행됐어요. 한 개인이 맨손으로 설계한 문자 체계가 한 민족의 문해율을 단번에 끌어올린 셈이에요.
개발자 눈으로 보면
이 이야기는 사실 '인코딩 설계' 이야기예요. 우리가 문자를 컴퓨터에 담을 때 쓰는 게 인코딩이잖아요. 세쿼야가 한 일은 체로키어라는 '도메인'에 딱 맞는 문자 집합(character set)을 처음부터 설계한 거예요. 영어에는 알파벳 26자가 맞고, 중국어에는 표의문자가, 체로키어에는 85개 음절 기호가 가장 잘 맞았던 거죠. 도메인에 맞는 추상화를 고르는 것 — 이게 좋은 설계의 핵심이라는 걸 200년 전 사례가 보여줘요.
우리에게도 익숙한 비교 대상이 있죠. 바로 한글이에요.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배우기 쉬운 문자를 의도적으로 설계했듯, 세쿼야도 '얼마나 쉽게 익힐 수 있는가'를 최우선에 뒀어요. 다만 한글은 자음·모음 같은 더 작은 자질을 조합하는 방식이고, 체로키는 음절을 통째로 기호 하나에 담는 방식이라 접근법이 서로 달라요. 같은 목표(문해율)를 향한 서로 다른 설계 철학인 셈이죠. 참고로 체로키 음절문자는 지금 유니코드(Unicode)에도 정식으로 등재돼 있어서, 디지털 세상에서도 멀쩡히 살아 있어요.
한국 개발자에게
직접 가져다 쓸 코드는 없지만, 곱씹을 만한 교훈이 있어요. 첫째, 좋은 설계는 결국 '문제 도메인에 얼마나 잘 맞느냐'로 결정된다는 것. 무작정 남이 쓰는 방식(알파벳)을 따라가지 않고 자기 언어의 구조를 분석해 최적의 단위를 찾아낸 세쿼야의 접근이 그래요. 둘째, '쓰는 사람의 학습 비용'을 설계 지표로 삼는 것. API를 만들든 UI를 만들든, 결국 널리 퍼지는 건 배우기 쉬운 쪽이거든요.
핵심 한 줄: '세쿼야는 글자를 몰랐기에, 오히려 자기 언어에 가장 잘 맞는 문자를 처음부터 설계할 수 있었다.'
여러분이라면 익숙한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도메인에 딱 맞는 추상화를 처음부터 새로 설계해본 경험이 있나요?
🔗 출처: Hacker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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