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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이스트랜싱 전투: 잊혀진 하루의 노사 충돌

1937년 이스트랜싱 전투: 잊혀진 하루의 노사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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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6월 7일 월요일, 미시간주립대(당시 미시간주립칼리지, MSC) 학생들이 기숙사 공사장에서 뽑아낸 90cm 길이의 콘크리트 철근을 손에 쥐고 이스트랜싱 거리로 몰려나왔다. 랜싱에서 넘어온 자동차노조(UAW) 조합원들을 밀어내기 위해서였다. 하루 만에 끝난 이 소동은 '이스트랜싱 전투'라는 이름으로 기록됐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잊힌 사건이다. 노동사학자 켄 저먼슨과의 1986년 인터뷰에서 UAW 랜싱 지역 182지부 위원장 레스터 워시번은 당시의 전말을 회고했다.

조직화의 성공이 부른 충돌

랜싱은 올즈모빌 조립공장, 피셔 차체공장, REO 모터카 등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였다. 1937년 초 REO에서 벌어진 4주간의 연좌농성은 UAW 182지부를 자동차 노동자의 대표 교섭단체로 인정받게 만든 결정적 승리였다. 워시번의 표현대로 "모두가 노조에 가입하고 싶어 하던" 분위기였다. 사건의 발단은 건물 철거업체 캐피탈시티 레킹이었다. 25명 직원 중 19명이 하룻밤 사이 노조 가입을 신청했지만, 회사는 이튿날 아침 새로 선출된 간부 6명을 해고하고 노조 인정을 거부했다. 이어진 소송에서 판사는 판결이 나올 때까지 노조 활동을 제한하는 임시 금지명령을 내렸고, 일부 당국자는 파업이 이 명령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6월 7일 새벽 2시, 랜싱 경찰은 워시번 부부를 체포하기 위해 집 문을 두드렸다. 위원장은 디트로이트에서 돌아오는 기차 안이었고, 열 살 미만의 세 아이와 함께 있던 아내 네바가 대신 연행됐다. 그날 밤 여러 노조 지도부와 그 배우자들이 함께 검거됐다. 뒤늦게 돌아온 워시번은 경찰이 미리 끊어놓은 전화선을 피해 공중전화로 사람들을 깨웠고, 체포를 면한 지도부와 함께 몇 시간 만에 '랜싱 노동 휴일'을 선포했다.

하루짜리 총파업과 '비행중대'

약 1만5,000명의 조합원이 항의 표시로 출근을 거부했다. 이들은 자갈 트럭을 앞세워 거리를 행진하며 상점과 공장, 극장의 문을 닫게 했고 경찰서와 시청, 주 의사당 앞에서도 시위를 벌였다. 1965년 미시간 히스토리 매거진에 실린 앨버트 블럼과 아이라 스파의 기록에 따르면, 경찰력이 완전히 마비된 사이 노동자들은 'Solidarity Forever'를 부르며 행진했고, 워시번의 이른바 '비행중대(flying squadron)'가 신속하게 상점 폐쇄를 이끌었다. 이들은 지부 이름을 수놓은 청금색 약모를 쓰고 있었으며, 언제든 즉각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이었다. 워시번은 상인들에게 폐점을 '요청'했을 뿐 유리창을 깬 사례나 불만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워시번은 휴일을 랜싱 경계 밖으로 확대하도록 허락한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조합원들을 태운 차들은 미시간 애비뉴를 따라 동쪽 이스트랜싱과 오키모스로 향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주요 교차로를 봉쇄하고 다운타운 상인들에게 폐점을 권했다. 문제는 이 대학촌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노조원들이 아직 약모를 쓴 탓에 상인들은 처음 이들을 재향군인 단체로 오해했고, 논쟁을 엿듣던 MSC 학생들은 이를 자신들의 식당과 생활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학생들의 반격과 레드시더강

오후 4시 넘어 상점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자 소식은 시연관(Demonstration Hall)까지 퍼졌다. 마침 ROTC 수업을 마친 제임스 애치슨 상사의 학생들이 노조원들이 처음 마주친 학생 무리였는데, 제복 차림 탓에 일부 노조원은 이들을 주방위군으로 착각했다. 애벗로드와 미시간 애비뉴 신호등 주변으로 학생들이 순식간에 500명 넘게 모여들었다. 이들은 차에서 노조원들을 끌어내렸고, 적어도 한 대의 차량이 뒤집혔으며, 여덟 명에서 스무 명 사이의 노조원이 아직 차가운 레드시더강에 던져졌다. 학생 대변인 격이었던 디트로이트 출신 제럴드 콕스는 스테이트저널에 "노조가 조직하고 교섭할 권리는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리가 있다"며 식당 폐쇄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충돌의 폭력성에 대한 기록은 제각각이지만, 학생들이 노조 대열을 랜싱 쪽으로 세 블록 밀어냈다는 점은 공통된다. 인간 사슬로 도로를 막았고 몇몇 노동자는 차에서 끌려 나와 포장도로에 내동댕이쳐져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 윌리엄스홀 공사장 부근에서 다시 주먹다짐이 벌어졌고, 이스트랜싱 경찰서장 캐슬 프랫이 양측 사이로 파고들었지만 소용없었다. 공교롭게도 프랭크 머피 주지사가 MSC 마구간에서 승마 중이었는데, ROTC 기병대가 말을 빌려 '전투'에 나서겠다고 청하자 그는 "코사크식"이라며 거절했다. 부상자는 파이프 비슷한 물체에 머리를 맞고 병원을 다녀온 2학년생 해럴드 콘래드 주니어가 유일했고, 나머지는 멍이나 눈두덩 부상 정도였다.

결국 노조 측이 전투 중단을 요청하며 상황은 마무리됐다. 올즈모빌 공장 노조 스튜어드 얼 해링턴은 확성기로 학생들에게 노조원들의 랜싱 귀환을 허락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 사건은 노조 조직화의 성공이 정점에 달했을 때 지역사회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충돌한 사례다. 학생들이 지킨 것은 이념이 아니라 자신들이 매일 이용하던 식당과 생활 편의였고, 노동운동의 정당한 권리와 '다른 사람들의 권리'가 어디서 부딪히는지를 보여준다. 상징적 조직 문화와 즉각적 동원력이 어떻게 순식간에 국면을 뒤집는지, 그리고 그 힘이 예상 밖의 집단과 마주쳤을 때 어떻게 역풍을 맞는지 역시 이 하루가 남긴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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