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모든 걸 평준화한다는 착각
요즘 개발 업계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이야기가 "AI 때문에 코딩의 진입 장벽이 사라진다"는 거예요. ChatGPT나 Claude, Cursor 같은 도구들이 코드를 술술 써주니까, 기술 자체의 차별성이 점점 무뎌진다는 거죠.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한 회사를, 한 개발자를, 한 프로덕트를 다른 것보다 우월하게 만들까요?
최근 화제가 된 한 블로그 글은 이 질문에 단호하게 답합니다. "진짜 해자(moat)는 늘 도메인 전문성이었다" 라고요. 해자라는 단어가 좀 어려운데요, 이게 뭐냐면 중세 성을 둘러싼 물길이거든요. 적이 쉽게 넘어올 수 없도록 막아주는 방어선이죠. 비즈니스에서는 "경쟁자가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우리만의 장벽"이라는 뜻으로 써요. 워런 버핏이 즐겨 쓰던 표현이에요.
글쓴이의 주장은 이래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기술 스택, 코드 품질, 빠른 개발 속도 같은 걸 해자라고 믿어왔지만 사실 그런 건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따라잡을 수 있는 영역이었다는 거예요. 진짜 따라잡기 힘든 건 특정 산업이나 비즈니스 영역에 대한 깊은 이해, 즉 도메인 전문성이라는 거죠.
왜 도메인 전문성이 중요해졌나
예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해도 "음, 그것도 맞지" 정도였어요. 그런데 AI가 코드 작성을 거의 무료에 가깝게 만들어 버리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React로 CRUD 앱 만들기" 같은 건 진짜로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주니어 개발자가 AI에게 잘 물어보면 시니어 못지않은 결과물을 뽑아내기도 하죠.
그런데 막상 의료 청구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한국 건강보험 청구 코드 체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떤 항목은 분리 청구가 안 되고 어떤 항목은 사전 승인이 필요한지, 보험 종류별로 본인부담률이 어떻게 다른지... 이런 건 AI에게 물어봐서 한방에 나오는 정보가 아니거든요. 수년간 그 업계에서 일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디테일이에요. 코드를 짜는 능력은 평준화됐지만,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능력" 은 여전히 희소합니다.
글쓴이는 자기 경험을 예로 들어요. 의료 청구, 부동산 권리 분석, 법률 계약서, 보험 언더라이팅, 항만 물류 같은 분야들은 외부에서 보면 "별거 아닌 폼 입력 시스템"처럼 보이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수십 년 누적된 규제와 관행, 예외 케이스로 가득해요. 이런 분야에서 SaaS를 만드는 회사들은 기술이 뛰어나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그 업계 사람들과 같은 언어로 대화할 수 있어서 살아남는다는 거예요.
기술 우월주의의 함정
실리콘밸리식 사고방식의 함정이 여기 있어요. 똑똑한 개발자들이 "이 업계는 너무 낙후됐어, 우리가 모던한 기술로 갈아엎으면 되겠네" 하고 뛰어들었다가 처참하게 실패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거든요. Theranos 같은 사기성 사례까지 가지 않더라도, 의료, 금융, 법률, 제조업에 진출했다가 "왜 이런 게 안 되지?"라며 좌절하고 철수한 스타트업이 정말 많습니다.
반대로 그 업계에서 오래 일하다가 "이거 소프트웨어로 만들면 되겠는데" 하고 창업한 사람들은 비교적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성장하는 경우가 많아요. Veeva Systems 같은 회사가 좋은 예예요. 제약 산업 전용 CRM을 만드는 회사인데, Salesforce가 훨씬 강력한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Veeva를 이기지 못해요. 제약회사의 영업 규제(미국 FDA의 Sunshine Act 같은)를 정확히 이해하고 거기 맞춰 제품을 만들었거든요.
AI가 도메인 지식을 대체할 수 있을까
여기서 자연스러운 반문이 나오죠. "AI가 점점 더 똑똑해지면 도메인 지식도 결국 학습하지 않을까?"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에요. LLM이 의료 지식, 법률 지식을 점점 더 잘 다루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진짜 도메인 지식은 문서화되지 않은 부분에 있다는 게 핵심이에요.
예를 들어 "이 보험사는 이 코드를 거의 무조건 반려하니까 처음부터 다른 코드로 청구해야 한다" 같은 현장 노하우, "이 지역 병원들은 이 시간대에 청구를 몰아 보내야 처리가 빠르다" 같은 암묵적 지식은 학습 데이터에 안 들어가 있어요. 이걸 알려면 그 업계 사람과 직접 대화하고, 같이 일해보고, 실제 데이터를 보며 패턴을 익혀야 합니다. AI가 잘하는 건 "이미 적혀 있는 지식의 재조합"이지, "적혀 있지 않은 현장의 맥락"은 아니거든요.
한국 개발자에게 주는 시사점
한국 개발자들에게도 이 메시지는 묵직해요. 우리는 지난 10년간 "React 잘하면 됨, 백엔드 잘하면 됨, MSA 잘하면 됨" 같은 기술 중심 커리어 패스에 익숙했잖아요. 하지만 AI가 코딩을 점점 더 잘하게 되는 흐름에서, 단순히 "코드 잘 짜는 개발자"는 차별화하기 점점 어려워질 거예요.
그래서 한 가지 추천하고 싶은 건 본인이 일하는 산업의 도메인 지식을 의식적으로 쌓는 것이에요. 핀테크 회사 다닌다면 금융 규제와 결제 시스템 구조를, 커머스 회사 다닌다면 물류와 정산 흐름을, 헬스케어 회사 다닌다면 의료 데이터 표준(HL7, FHIR 같은)을 깊이 파고드는 거죠. "개발만 하는 개발자"보다 "이 업계를 아는 개발자"가 훨씬 비싸지는 시대가 오고 있어요.
그리고 창업이나 사이드 프로젝트를 생각한다면, 본인이 잘 아는 영역에서 출발하는 게 압도적으로 유리해요. 모두가 비슷한 AI 코딩 도구를 쓸 수 있는 세상에서, 차별화는 결국 "내가 이 문제를 남보다 깊이 안다"에서 나옵니다.
마무리
한 줄로 정리하면 "코드는 점점 싸지지만,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아는 능력은 점점 비싸진다" 입니다. AI가 도구를 평준화할수록 사람의 가치는 도구를 어떻게 쓸지 아는 맥락과 통찰로 옮겨가는 거예요.
여러분은 어떤 도메인에 가장 깊은 전문성을 가지고 계신가요? 혹시 "기술 스택은 자신 있는데 정작 우리 회사 비즈니스는 잘 모르겠다" 싶다면, 다음 분기에는 사업팀이나 운영팀 미팅에 한 번 더 들어가 보는 건 어떨까요?
🔗 출처: Hacker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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