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밈에서 'NPC(논플레이어 캐릭터)'는 대체로 조롱의 뉘앙스를 가진 단어다. 게임 속 배경 인물처럼 자기 주관 없이 정해진 대사를 반복하고, 남의 서사에서 조연으로 살아가며, 스마트폰을 무한정 넘겨보는 사이 인생이 흘러가도록 방치하는 사람. 자율성을 스스로 포기한 존재라는 것이 통상적인 해석이다. 그런데 한 개인 블로그의 짧은 글은 이 낙인을 정반대로 뒤집는다. NPC로 사는 것이야말로 꽤 괜찮은, 실현 가능한 삶의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이다.
글쓴이의 논리는 단순하지만 허를 찌른다. 게임 속 NPC는 사실 남의 인생을 구경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개의치 않고 자기 할 일을 한다. 플레이어가 용을 잡든 말든, 심지어 자기 물건을 훔쳐 가든 말든 동요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를 다소 극단적으로 표현해 '궁극의 무심함(I don't give a fuck)' 상태라고 부른다. 외부 사건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궤도를 지키는 태도라는 것이다.
스카이림 대장장이가 보여주는 것
예시로 등장하는 것이 게임 '스카이림'의 대장장이 NPC다. 그는 플레이어가 세계에서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대장일을 계속한다. 명장이든 시작 마을의 서툰 견습생이든, 자신에게 부여된 수준만큼 자기 일을 해낸다. 저자가 주목하는 지점은 '탁월함'이 아니라 '일관성'이다. 남의 성취와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외부 자극에 반응하기보다 자기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태도. 그는 이것이 어쩌면 스토아 철학을 비롯한 오랜 사상들이 되풀이해 온 이야기, 즉 '그저 자기 할 일을 하라'는 지혜의 재서술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인다.
글의 결론부는 더 노골적이다. 지루한 차를 몰아도 상관없고, 재미없는 직업을 가져도 괜찮으며, 퇴근 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핵심은 '해야 할 것 같아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무언가를 하라는 데 있다. 주인공이 되려는 강박을 내려놓는 순간에야 비로소 자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마무리다.
왜 이 이야기가 IT 실무자에게 걸리는가
이 글 자체는 철학 논문이 아니라 감성적인 단상에 가깝다. 그럼에도 개발자와 IT 실무자에게 유독 신경 쓰이는 대목이 있다. 업계는 오랫동안 '메인 캐릭터'가 되라고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사이드 프로젝트로 존재감을 증명하고, 퇴근 후에도 새 프레임워크를 학습하며, 개인 브랜딩과 링크드인 서사를 관리하고, 커리어를 끊임없이 '레벨업'해야 한다는 압박은 이미 하나의 문화다. NPC 예찬은 바로 이 성장 서사에 대한 반작용으로 읽힌다.
실무적으로 번역하면 이렇다. 남의 커밋 수, 남의 승진, 남의 화려한 이력에 반응해 자신의 궤도를 흔드는 대신, 맡은 일을 꾸준히 제대로 해내는 것에 무게를 두는 태도. 번아웃이 만연한 직군에서 '퇴근 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자발적 몰입과 의무적 소진을 구분하라는 메시지는, 성과 지표에 자아를 묶어 온 사람일수록 곱씹어 볼 만하다.
다만 이 관점은 뚜렷한 한계를 안고 있다. 저자 스스로 인정하듯 비유가 극단적이고, 게임 속 NPC는 애초에 성장할 필요도, 생계를 스스로 책임질 필요도 없는 존재다. '무심함'과 '무관심'은 종이 한 장 차이여서, 자칫하면 정당한 개선 노력이나 협업에서의 책임까지 회피하는 핑계로 변질될 수 있다. 게임 대장장이는 실직도, 기술 부채도, 조직 정치도 겪지 않는다. 현실의 직업인은 어느 정도의 적응과 학습 없이는 자기 자리를 지키기 어렵다.
그래서 이 글은 처방이라기보다 하나의 질문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정확하다. 나는 지금 '하고 싶어서' 일하고 있는가, 아니면 '뒤처질 것 같아서' 일하고 있는가. 주인공 강박을 내려놓자는 제안은 야망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남의 서사에 반응하느라 정작 자기 궤도를 잃지 말라는 환기에 가깝다. 짧은 개인 블로그 글 한 편이 오래된 스토아적 지혜를 게임 밈의 언어로 되살렸다는 점만으로도, 한 번쯤 멈춰 자신의 동기를 점검할 계기는 충분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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