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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100자리를 외우는 법, 그리고 '암기는 재능이 아니라 공학'이라는 발견

암기력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흔히 믿는다. 하지만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이자 블로거인 그레고리 건더슨은 3년 전 원주율 파이의 소수점 아래 100자리를 외우면서 그 통념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고 말한다. 조슈아 포어의 책 『아인슈타인과 문워킹』을 읽고 반쯤 장난삼아 시작한 일이었는데, 책의 핵심 주장인 '적절한 기법과 의도적 연습만 있으면 거의 누구나 초인적으로 보이는 기억력을 발휘할 수 있다'가 실제로 통했다는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지점은 단순히 기법이 먹혔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기법이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막연하고 형체 없는 문제를 규율과 방법론의 문제로 바꿔놓았다는 데 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암기가 공학이 되었다.

뇌는 의미 없는 정보에만 약하다

대부분의 기억술은 하나의 관찰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뇌는 암기 자체에 약한 것이 아니라 특정 종류의 정보를 외우는 데만 약하다는 것이다. 단기 기억에는 대개 5~9개의 대상밖에 담지 못하지만, 어린 시절 살던 집은 비교적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다. 자동차 정비사가 엔진 구조를 손바닥 보듯 아는 것도 마찬가지다. 절대적인 정보량으로 보면 우리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지만, 그 정보에 의미나 맥락이 없을 때 무너진다. 기억술은 이 약점을 '정교화 부호화(elaborative encoding)'로 우회한다. 외우기 어려운 대상을 외우기 쉬운 대상과 연결하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장소법(method of loci)', 즉 익숙한 공간인 '기억의 궁전'에 외울 대상을 배치하고 나중에 그 궁전을 머릿속으로 걸으며 하나씩 떠올리는 방법이다.

PAO 시스템: 숫자를 이미지로 자동 변환하기

숫자를 외우기 위해 건더슨이 사용한 것은 좀 더 현대적인 '인물-행동-사물(person-action-object, PAO)' 시스템이다. 00부터 99까지 100개의 두 자리 숫자 각각에 한 명의 인물, 하나의 행동, 하나의 사물을 대응시킨다. 그러면 임의의 여섯 자리 숫자는 '첫 두 자리의 인물이, 다음 두 자리의 행동을, 마지막 두 자리의 사물에 하는' 하나의 장면으로 부호화된다. 그는 이 여섯 자리짜리 이미지를 '글리프'라 부른다. 예컨대 그의 파이 궁전에는 '아인슈타인이 레오타드를 빙글빙글 돌리는' 글리프가 있는데, 이는 502884를 뜻한다. 인물·행동·사물이 각각 100개씩이므로 조합은 100만 개, 즉 어떤 여섯 자리 숫자든 고유하고 기억할 만한 장면 하나로 바뀐다. PAO의 힘은 바로 이 부호화 과정을 자동화한다는 데 있다.

놀라운 점은 정작 100자리 암기 자체는 쉬웠다는 것이다. 100자리는 글리프 17개에 불과하고, 그는 오래된 친구의 아파트라는 작은 기억의 궁전에 이것을 한 시간 남짓, 단 한 번의 앉은 자리에서 집어넣었다. 진짜 고된 일은 그 앞단, 즉 100개의 기본 글리프로 이루어진 PAO 자체를 만들고 외우는 작업이었다. 특히 스프레드시트로 PAO를 설계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이 들었다. 각 인물·행동·사물이 서로 최대한 멀리 흩어져 있어야 혼동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키이라 나이틀리(777777)와 나탈리 포트먼(222222)을 둘 다 넣은 것을 실수로 꼽는다. 두 배우는 디코딩 속도가 빠를 때 헷갈릴 수 있지만, 다스 베이더(171717)나 세리나 윌리엄스(060606)와는 절대 섞이지 않는다. PAO 암기는 지하철 출퇴근길에 Anki 카드로 해결했다.

오류가 '국소적'이라는 것의 의미

실무자에게 흥미로운 대목은 이 방식이 왜 안정적인가에 대한 그의 분석이다. 첫째, 전 과정이 작고 관리 가능한 단위로 쪼개져 있어 막연한 불안이 없다. 둘째, 암송 중 실수가 항상 '국소적'이다. 오류는 대개 글리프 하나를 잘못 해독하는 데 그친다. 예컨대 그는 PAO를 어린 시절 집의 방마다 십의 자리별로 배치해 두었는데, 그래서 '빙글빙글'을 282828 대신 인접한 방에 있는 383838로 착각하는 식이다. 거의 모든 오류가 두 자리 숫자 하나를 한 자릿수대만큼 틀리는 형태다. 파이를 노래로 외우거나 시처럼 통암기했다면, 한 번 막혔을 때 어디였는지조차 잃고 통째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전역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에게 이런 전역 오류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셋째와 넷째 특성도 같은 구조에서 나온다. 그는 암송 도중 아무 곳에서나 멈췄다가 재개할 수 있다. '일시정지'란 궁전 안에서 걸음을 멈추는 것이고, 다음 글리프를 새 궁전에 저장해두면 몇 주 단위의 휴지도 견딘다고 본다. 또 궁전을 거꾸로 걸으며 각 글리프를 역순으로 해독하면 뒤로 암송하는 것도 앞으로 가는 것만큼 빠르다. 매번 두 자리씩만 뒤집으면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스템은 확장된다. 100자리가 17개 글리프였으니 1,000자리도 원리상 어렵지 않으며, 진짜 과제는 여러 궁전을 어떤 순서로 '점프'할지 정하는 조직화 문제일 뿐이다. 그는 궁전을 물리적 공간의 동쪽에서 서쪽 순으로 배열하는 식의 규칙을 쓸 것이라고 말한다. 어렵다기보다 수익이 급감하는 노동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기억력 자랑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평범한 기억력으로 시작했고 지금도 그렇다고 분명히 밝힌다. 마법은 없었고 오직 기법과 연습만 있었다. 우리는 흔히 '나는 X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못 한다'고 스스로를 가두는데, 그런 믿음은 대개 몇 안 되는 이른 경험에 근거하고서도 좀처럼 재검토되지 않는다. 개발자에게 이 이야기가 남기는 실용적 함의는 두 가지다. 하나는 막연해 보이는 학습·기억 과제도 부호화 규칙과 인덱싱 구조를 먼저 설계하면 공학적 문제로 환원된다는 점, 다른 하나는 그렇게 얻은 '오류가 국소적이고 복구 가능하며 확장되는' 시스템의 속성이 좋은 소프트웨어 설계의 미덕과 정확히 겹친다는 점이다. 물론 이 방법의 한계도 분명하다. 사전 투자가 크고, 파이 자릿수 같은 임의의 숫자열을 외우는 실용적 효용은 그의 말대로 '적당히 유용한' 수준에 그친다. 그럼에도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경험으로 바꿔본 일이 무엇보다 크게 삶을 바꿨다는 그의 소회는, 기술 이상의 것을 생각하게 한다.

SOURCE · HACKER NEWS
원문 전체 보기 → https://gregorygundersen.com/blog/2024/12/21/engineering-m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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