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떠나는 1980년대 실리콘밸리
스탠퍼드 대학교 도서관이 공개한 디지털 컬렉션 중에 사진작가 더그 메누에즈(Doug Menuez)의 아카이브가 있어요. 메누에즈는 1985년부터 2000년까지 약 15년 동안 실리콘밸리 회사들의 내부를 기록했는데, 그중 중요한 축이 NeXT Computer예요. 젊은 스티브 잡스와 NeXT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 당시 사무실 풍경이 꽤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메누에즈는 이 시기 작업을 『Fearless Genius』라는 사진집으로도 냈고요.
그냥 옛날 사진 구경 아니냐고요? 여러분이 지금 쓰는 맥북과 아이폰의 운영체제가 사실상 이 회사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얘기가 달라지죠.
NeXT는 어떤 회사였나
1985년, 스티브 잡스는 자기가 세운 애플에서 내부 갈등 끝에 밀려나요. 그리고 곧바로 NeXT를 세우는데, 목표는 대학과 연구기관을 위한 고성능 워크스테이션이었어요. 1988년에 공개된 첫 제품이 그 유명한 검은색 정육면체, NeXT Computer(흔히 NeXT Cube라고 불러요)예요.
하드웨어는 멋졌지만 비쌌어요. 시작 가격이 6,500달러 정도였는데, 당시로서는 대학 연구실에도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죠. 결국 NeXT는 1993년에 하드웨어 사업을 접고 소프트웨어 회사로 방향을 틀어요. 장사만 놓고 보면 실패에 가까웠어요.
그런데 소프트웨어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어요
NeXT의 진짜 유산은 운영체제 NeXTSTEP이에요. 구성 요소를 하나씩 보면 지금 봐도 놀라워요.
Mach 커널 + BSD 유닉스: 카네기멜런 대학의 Mach 마이크로커널 위에 BSD 유닉스를 얹은 구조였어요. 이게 나중에 macOS 커널인 XNU의 뿌리가 돼요.
Objective-C와 객체지향 프레임워크: 앱을 만들 때 쓰는 라이브러리(AppKit과 오늘날 Foundation의 전신)가 처음부터 객체지향으로 설계돼 있었어요. 지금도 macOS/iOS 코드를 보면 NSString, NSArray처럼 NS로 시작하는 클래스가 잔뜩 나오는데, 이 NS가 바로 NeXTSTEP에서 온 거예요. 30년 넘게 이름표가 그대로 붙어 있는 셈이죠.
Interface Builder: 마우스로 버튼과 창을 끌어다 놓으면서 UI를 만드는 도구예요. 지금은 당연한 개념이지만 당시엔 GUI를 코드로 한 줄 한 줄 짜는 게 보통이었거든요. 이 도구는 나중에 Xcode에 통합됐어요.
Display PostScript: 화면에 그리는 방식과 프린터로 인쇄하는 방식을 같은 기술로 통일했어요. 덕분에 화면에 보이는 그대로 인쇄되는 'WYSIWYG'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었죠.
NeXT 위에서 만들어진 것들
NeXT 컴퓨터는 많이 팔리지 않았지만, 산 사람들이 엄청난 걸 만들었어요. 1990년 CERN의 팀 버너스리는 NeXT 컴퓨터로 세계 최초의 웹 브라우저이자 편집기인 WorldWideWeb과 웹 서버를 만들었어요. 지금 우리가 쓰는 웹이 NeXT 위에서 태어난 거예요. id Software도 둠(Doom)을 만들 때 맵 에디터 같은 개발 도구를 NeXTSTEP에서 만든 걸로 유명해요. 그만큼 개발 생산성이 뛰어났다는 증거죠.
그리고 애플로 돌아오다
1990년대 중반의 애플은 차세대 운영체제 개발에 연달아 실패하면서 위기에 빠져요. 결국 1996년 말 애플은 NeXT를 약 4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했고, 잡스는 그렇게 애플로 돌아와요. NeXTSTEP은 손질을 거쳐 2001년 Mac OS X가 됐고, 이게 다시 iOS, iPadOS, watchOS로 이어져요. 실패한 회사의 운영체제가 결국 수십억 대의 기기에 들어간 셈이에요.
한국 개발자에게 주는 시사점
iOS나 macOS 개발자라면 매일 쓰는 NS 접두사, 델리게이트 패턴, 타깃-액션 패턴 같은 설계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나면 프레임워크가 다르게 보일 거예요. Swift와 SwiftUI로 넘어가는 지금도 그 밑바닥에는 NeXT 시절 설계가 살아 있거든요.
더 넓게 보면 좋은 기술이 시장에서 바로 이기는 건 아니지만, 좋은 설계는 결국 살아남는다는 교훈도 얻을 수 있어요. 사이드 프로젝트가 당장 성공하지 못해도, 거기서 쌓은 기술과 경험이 뜻밖의 곳에서 꽃필 수 있다는 거죠.
마무리
한 줄 정리: NeXT는 회사로서는 실패했지만, 그 소프트웨어는 오늘날 애플 생태계와 월드와이드웹의 뿌리가 됐어요.
여러분은 기술은 좋았는데 시장에서 실패한 제품 중에 기억나는 게 있나요? 그 기술은 지금 어디서 살아남아 있을까요?
🔗 출처: Hacker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