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반년 전만 해도 은행들은 오라클, 메타 등이 주도하는 AI 인프라 구축에 돈을 대려고 서로 경쟁하듯 데이터센터 대출을 인수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가운데 상당수가 자기 장부에서 해당 부채를 덜어내려 움직이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JP모건, 모건스탠리, SMBC, MUFG는 조용히 '유의미한 위험 이전(SRT)' 거래를 타진해 왔다. 대출 자체는 장부에 남겨두되 가장 위험한 조각만 외부 투자자에게 넘기는 방식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특정 은행이 들고 있을 수 있는 AI 관련 익스포저의 내부 한도에 근접했기 때문이다.
6개월째 소화되지 않는 380억 달러
상황이 얼마나 막혔는지는 한 사례가 잘 보여준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JP모건과 MUFG를 포함한 은행단은 텍사스와 위스콘신에 있는, 오라클이 임차한 데이터센터 건설 부채 380억 달러를 배분하는 데 6개월 넘게 애를 먹고 있다. 일부 대출기관은 이를 털어내기 위해 비은행 매수자에게 할인된 가격으로라도 넘기려 한다. 애초에 끝까지 보유하려고 인수한 부채가 아닌데 반년을 떠안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호다. 맨그룹의 신용위험공유 공동대표 매튜 모니오는 FT에 거래 규모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본 그 어떤 것과도 규모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위험의 가격을 매기는 것이 본업인 사람이, 기존 모델에 들어맞지 않는 숫자라고 토로한 셈이다.
오라클이라는 가장 선명한 지표
긴장의 중심에는 오라클이 있다. 블룸버그가 인용한 시장 데이터에 따르면 오라클의 5년물 신용부도스와프(CDS)는 10월 초 약 151bp까지 올라, 2009년 이후 보지 못한 수준에 이르렀다. S&P는 이미 7월에 오라클 신용등급을 투기등급 바로 한 단계 위인 BBB-로 내렸고, S&P 강등 직후 CDS는 18년 만의 최고치인 203bp까지 치솟았다. 오라클은 지난 9월 하루 만에 180억 달러 규모 채권을 발행한 데 더해, 이번 회계연도에 400억 달러가 넘는 추가 부채와 자본을 조달하려는 것으로 전해진다. 텍사스·위스콘신·뉴멕시코 사이트 자금을 계속 대기 위해서다. 여기에 위스콘신 포트워싱턴 캠퍼스를 두고 70억 달러가 넘는 담보 예치를 강제할 수 있는 규정을 놓고 오라클이 주 공공서비스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안도 등급 강등을 압박한 요인으로 지목된다. AI 지출이 현금흐름을 앞지르고 있다는 평가다.
수요 자체도 얇아졌다. 알파벳·아마존·메타·마이크로소프트·오라클의 채권은 이제 비슷한 등급의 비AI 회사채보다 높은 가격, 즉 더 낮은 수익률에 거래된다. 그런데 블룸버그에 따르면 이들 발행의 주문장(order book)은 2월 발행 물량의 약 5배에서 7월에는 2배 미만으로 쪼그라들었다. 메타의 최근 채권은 1년 전 발행 때보다 투자자 수요가 3분의 1가량 줄었다. 알아서 팔리는 채권과 은행이 발로 뛰어 소화시켜야 하는 채권의 차이가 벌어진 것이다.
거시 환경도 역풍이다. 이달 10년물 국채 금리는 2002년 이후 최고인 5.304%를 기록했고, 390억 달러 입찰이 2000년 이후 최고 낙찰금리인 5.30%에 체결됐다. 연준의 9월 회의록은 AI 관련 기업 차입을 금리 상승의 한 요인으로 지목했지만, 캐피털이코노믹스는 더 큰 동인은 인플레이션과 재정적자라고 본다. 원인이 무엇이든 데이터센터 자금을 조달하려는 쪽에서 체감하는 결과는 같다. 빌리는 기준이 되는 무위험금리 자체가 크게 비싸졌다.
실무자가 봐야 할 지점
헤드라인 숫자보다 메커니즘이 더 중요하다. 은행은 확신이 있는 부채를 되팔지 않는다. 집중도가 걱정될 때 되판다. '내부 한도에 근접했다'는 말은 결국 한 은행의 대차대조표가 한 섹터의 생존 여부에 지나치게 걸려 있다는 뜻이다. 1,200억 달러 규모의 AI 인프라 지출을 특수목적법인(SPV)에 흩어 담은 것은 이 위험을 소화하기 쉽게 만들려는 설계였다. 오라클·메타·xAI·코어위브가 모두 부채를 자기 장부 밖에 두기 위해 쓴 구조다. 그러나 위험은 결국 그 SPV에 자금을 댄 은행들로 되돌아오고 있다.
투자자들은 들어갈 곳을 더 까다롭게 고른다. 자본은 마이크로소프트·구글 같은 투자등급 하이퍼스케일러가 임차한 데이터센터로 쏠리고, 신용도가 약한 쪽에서는 빠져나간다. CCIR 집계 기준으로 코어위브 임차 채권이 7.00~9.875%에 가격이 매겨지는 반면 하이퍼스케일러 임차 채권은 5.70~7.875%에 거래되는 이유다. 자본이 얇은 소규모 AI 인프라 기업이 다음 분기에 부채를 조달하려면 오라클과 같은, 그러나 더 예민해진 대출자 풀을 놓고 경쟁해야 한다. 오라클의 대차대조표도, 기존 고객 기반도 내세우지 못한 채로 말이다.
이 대목은 하루치 주가 변동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AI 붐은 신용이 합리적 조건으로 무기한 열려 있으리라는 전제 위에서 돌아간다. 은행이 380억 달러 대출을 6개월째 팔지 못하는 장면은, 그 전제가 몇 년 뒤의 가상 침체가 아니라 지금 실시간으로 시험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다만 CDS 급등과 주문장 축소가 일시적 자금 경색의 반영인지, 수요 구조의 전환인지는 아직 단정하기 이르다. 금리 상승의 원인을 둘러싼 해석도 엇갈리는 만큼, 숫자의 방향과 함께 그 지속성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