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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쪽짜리 책을 잘라 읽자: 디자이너가 던진 물성의 재발견

850쪽짜리 책을 잘라 읽자: 디자이너가 던진 물성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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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매트 커클랜드(Matt Kirkland)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은 도발적인 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당신의 책에 칼을 대라." 파괴적으로 들리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데이터 추출을 위해 책을 분해하는 이른바 'AI 스캐너'식 훼손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책을 더 잘, 더 오래 읽기 위한 실용적 제안에 가깝다. 물성을 다루는 사람의 시선에서 나온 이 짧은 글은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가 소유한 물건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제법 큰 질문을 건드린다.

계기는 독서 모임이었다. 그의 모임이 최근 고른 책은 퓰리처상 수상작인 서부극 소설 '론섬 도브(Lonesome Dove)'였다. 서부극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던 그도 이 작품이 왜 상을 받았는지 인정할 만큼 좋았다고 한다. 문제는 내용이 아니라 형태였다. 850쪽이 넘는 페이퍼백.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이 책은 '너무 크다(Too Big)'.

물성이 만드는 독서의 마찰

두께가 곧 불편이 된다. 850쪽짜리 책을 다 읽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그 무게를 손으로 떠받쳐야 하니 손이 지친다. 침대에 누워 읽으면 머리 위로 두꺼운 책을 들고 있어야 해서 팔이 아파온다. 비행기나 버스에 챙겨 가려면 가방의 절반을 차지한다. 커클랜드는 여기에 '책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라(Chop That Book Up Into Reasonable Sizes)'라는 자신만의 해법을 내놓는다. 몇 분과 간단한 도구 몇 개면 충분하고, 그 결과로 큰 책을 감당할 만한 크기의 여러 권으로 나눠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가 이 행위를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그는 요즘 자주 회자되는 '그냥 하면 된다(You can just do things)'는 태도를 반복하는 셈이라면서도, 책을 잘라도 아무도 경찰을 부르지 않고 저자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쓴 책 역시 '너무 큰' 축에 속한다고 인정하며, 누군가 그 책을 잘라 읽어도 개의치 않겠다고 덧붙인다. 소유한 물건에 대한 권리를 스스로 되찾자는 일종의 선언인 셈이다.

실무자에게 남기는 함의

이 글이 IT 실무자에게 주는 울림은 도구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우리는 정품 소프트웨어의 UI를 커스터마이징하고, 오픈소스를 포크해 필요에 맞게 고치고, 하드웨어를 열어 부품을 바꾸는 일에는 익숙하다. 그런데 유독 종이책 앞에서는 '완제품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무의식적 경건함이 작동한다. 커클랜드의 제안은 그 경건함을 걷어내고 책 또한 목적에 맞게 재구성 가능한 도구로 보자는 것이다. 파괴가 목적인 AI 스캐너와의 선긋기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같은 '자르기'라도 데이터를 뽑아내려 원본을 없애는 행위와, 더 잘 읽기 위해 형태만 바꾸는 행위는 지향점이 정반대다. 도구를 자기 방식대로 길들이는 해커적 감각은 소프트웨어 바깥에서도 유효하다.

다만 이 글은 태도의 제안일 뿐, 실행 매뉴얼로 읽기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공개된 원문 발췌는 '책이 너무 클 때 내가 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라는 문장에서 끊겨 있어, 정작 어떤 도구로 어떻게 자르고 제본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절차는 확인되지 않는다. '몇 분이면 되고 도구가 거의 필요 없다'는 언급만 남아 있을 뿐이다.

현실적인 판단도 필요하다. 잘라낸 책은 중고로 되팔기 어렵고, 도서관 책이나 소장 가치가 있는 판본, 제본이 약한 책에는 적용하기 곤란하다. 결국 이 제안은 모두에게 권할 보편적 방법이라기보다, 이미 소유했고 오래 읽을 두꺼운 책을 실용적으로 소비하려는 사람에게 맞는 선택지다. 그럼에도 '내가 산 물건은 내 목적에 맞게 바꿔도 된다'는 감각을 종이책이라는 뜻밖의 대상에 적용해봤다는 점에서, 커클랜드의 짧은 글은 곱씹어볼 만한 자극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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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전체 보기 → https://attainablefelicity.mattkirkland.com/20260915/cut-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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