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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2년 손으로 그린 900쪽 색채 사전, 팬톤 이전의 '컬러 표준'을 다시 보다

1692년 손으로 그린 900쪽 색채 사전, 팬톤 이전의 '컬러 표준'을 다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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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을 다루는 일은 늘 '같은 색을 어떻게 다시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문제와 싸워 왔다. 디지털 환경에서 우리는 16진수 코드와 RGB, CMYK 값, 그리고 디자인 시스템의 컬러 토큰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런데 이런 체계화된 색 지정 도구가 등장하기 훨씬 전, 한 사람이 손으로 900쪽에 달하는 색 견본집을 만들었다. 1692년 네덜란드에서 A. 부게르트(A. Boogert)라는 저자가 완성한 수채화 안료 해설서가 그것이다. 프랑스어 제목은 'Traité des couleurs servant à la peinture à l'eau', 원래의 네덜란드어 제목은 'Klaer Lightende Spiegel der Verfkonst'로, 직역하면 '회화 예술을 밝게 비추는 거울' 정도의 뜻이다.

이 책은 단 한 부만 제작되었다. 700쪽이 넘는 분량이 색 견본으로 채워져 있고, 손으로 쓴 네덜란드어 설명이 안료를 어떻게 만들고 섞는지, 그리고 '물을 한 번, 두 번, 세 번' 더해 색조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서술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색 체계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이다. 빛의 스펙트럼으로 색을 설명한 뉴턴의 '광학(Opticks)'은 이보다 10여 년 뒤에야 나왔다. 즉 부게르트의 작업은 근대 색채 이론의 문턱에서, 이미 저물어 가던 옛 체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한 부뿐이었던 '표준'의 운명

이 책이 당대 화가들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책이 완성될 무렵 네덜란드 황금기를 이끌던 거장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1692년에 여전히 활동하던 이들이 세상에 단 한 부뿐인 필사본을 접했을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교하게 정리된 참조 자료라도, 복제되어 유통되지 않으면 영향력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이 책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색의 표준화라는 꿈이 실용적인 도구로 자리 잡기까지는 이후로도 약 100년이 더 걸렸다. 괴테의 1810년 '색채론', 1814년에 나와 찰스 다윈도 활용했다고 알려진 베르너의 '색채 명명법' 같은 책들이 뒤를 이었고, 색 표준화의 꿈은 1963년 설립된 팬톤(Pantone)에 이르러 산업적으로 실현되었다. 이 책의 견본 페이지들이 '이름 없는 팬톤 컬러 칩' 같다는 평가(리파이너리29)가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같은 아이디어가 거의 300년 먼저 나왔지만, 전파 수단이 없어 가정에서 쓰는 이름으로 남지 못했다.

실무자가 다시 읽는 지점

소프트웨어와 디자인 실무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는 몇 가지를 되짚게 한다. 첫째, 색은 '값'이 아니라 '재현 과정'으로 정의된다는 점이다. 부게르트가 물의 양으로 색조 단계를 기록한 방식은, 오늘날 디자인 시스템이 기본 색에서 명도·채도 단계를 파생시키는 토큰 구조와 본질적으로 같은 발상이다. 색 하나를 고정하는 것보다, 그 색을 변주하는 규칙을 문서화하는 편이 더 실용적이라는 통찰이 300여 년 전 수작업에도 담겨 있었던 셈이다.

둘째, 아무리 완결성 높은 레퍼런스라도 접근성과 버전 관리가 없으면 '자산'이 되지 못한다. 단일본으로 묻혀 있던 이 책은 중세사 연구자 에릭 크바켈이 프랑스 데이터베이스에서 발견하면서 비로소 재조명되었다. 현재 원본은 엑상프로방스의 메잔 도서관(Bibliothèque Méjanes)에 소장되어 있고, 누구나 전 페이지를 고해상도로 확대해 볼 수 있다. 디지털화와 공개가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이 자료는 전 세계가 참조할 수 있는 공용 리소스가 되었다.

결국 이 900쪽짜리 필사본은 두 가지 교훈을 동시에 던진다. 좋은 참조 체계는 값의 나열이 아니라 재현 규칙의 기록이며, 그 기록은 복제·배포·접근이 보장될 때에만 실제로 쓸모를 가진다는 것이다. 색 관리든 디자인 토큰이든 사내 문서든, '잘 만든 단 하나'보다 '공유되고 갱신되는 체계'가 중요하다는 원칙은 17세기의 안료 해설서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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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전체 보기 → https://www.openculture.com/2026/10/a-900-page-pre-panton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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