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신저 시그널(Signal)이 전화번호 없이 계정을 만들 수 있는 방향을 두고 커뮤니티에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시그널은 종단간 암호화로 메시지 내용을 강력히 보호해 왔지만, 가입 단계에서 반드시 전화번호를 요구한다는 점이 오랜 약점으로 꼽혔다. 전화번호는 실명·통신사 기록·다른 서비스 계정과 쉽게 연결되는 식별자이기 때문에, 아무리 대화 내용이 안전해도 '누가 누구와 쓰는가'라는 메타데이터 차원의 노출 우려가 남았다. 이번 논의의 핵심은 그 전화번호 의존을 걷어내면서도 스팸과 남용을 막는 균형을 어떻게 잡느냐다.
영지식 증명이 이미 하고 있는 일
논의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기술이 영지식 증명(zero-knowledge proof, ZKP)이다. 어떤 사실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되, 그 사실의 구체적인 내용은 상대에게 전혀 드러내지 않는 암호학 기법이다. 시그널에서 이 기술은 낯선 것이 아니다. 후원 배지나 백업 결제, 그리고 그룹 기능이 이미 ZKP 위에서 돌아간다는 설명이 나온다. 예컨대 서버는 사용자가 정당한 후원자라는 사실이나 특정 그룹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사용자를 특정 후원 내역이나 특정 그룹에 묶어 식별하지는 못한다. 자격은 검증하되 신원은 노출하지 않는 구조다.
같은 원리가 사용자명(username)에도 적용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용자명이 허용된 문자 집합과 길이 규칙을 지켰는지를 서버가 확인하되, 실제 문자열 내용은 서버에 드러내지 않고 검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접근은 전화번호 없는 가입에서도 그대로 쓰일 수 있다. 계정이 정당하게 생성된 자격을 갖췄음을 증명하면서, 그 계정을 특정 실물 식별자와 연결하지 않는 방식이다.
'서버를 믿지 않는' 설계
또 하나 강조된 대목은 시그널 클라이언트가 애초에 서버를 신뢰하지 않도록 설계됐다는 점이다. 보안의 근거를 서버 운영자의 선의나 서버 코드의 무결성에 두지 않고, 클라이언트 측의 암호학적 검증에 두는 구조라는 뜻이다. 커뮤니티에서는 서버 코드를 들여다보지 않고도 시그널의 안전성을 논증할 수 있다는 표현까지 나왔다. 실무자 관점에서 보면 이는 '신뢰 최소화(trust minimization)' 설계의 전형으로, 서버가 침해되거나 강제로 데이터를 요구받는 상황에서도 노출될 수 있는 정보의 양 자체를 줄이는 방향이다. 다만 이는 커뮤니티 참여자의 주장이며, 실제 구현의 세부는 공개 사양과 감사로 확인해야 할 몫이다.
남는 질문: 기존 번호는 어떻게 되나
정작 실무적으로 민감한 부분은 이미 전화번호로 가입한 사용자들의 처지다. 재가입 없이 전화번호만 '연결 해제'할 수 있는지, 해제하면 전화번호가 사용자명과 완전히 분리되는지, 그리고 기기 로컬이나 서버에 어떤 흔적이 남는지가 아직 명확하지 않다. 커뮤니티에서는 연결 해제가 100% 완전한 분리가 아닐 수 있다는 의구심과 함께, 차라리 처음부터 전화번호 없는 새 계정을 만드는 편이 더 깔끔할 수 있다는 견해도 제기됐다. 프라이버시를 목적으로 하는 기능일수록, '해제됐다'는 상태가 기술적으로 무엇을 보장하는지 조직 차원의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스팸 문제도 간단치 않다. 전화번호 연결 해제를 무료로 무제한 허용하면, 공격자가 번호 하나로 가입한 뒤 해제하고 다시 가입하는 과정을 반복해 사실상 무한한 계정을 찍어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를 막기 위한 쿨다운(재사용 대기 기간) 도입이 거론되지만, 한 달 정도의 대기로도 조직적인 스팸·사기 계정을 충분히 억제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기간을 너무 길게 잡으면 정상 사용자의 편의를 해친다는 딜레마가 지적된다. 남용 방지와 접근성 사이의 이 긴장은 전화번호가 담당하던 '희소한 신원 자원' 역할을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라는 근본 물음으로 이어진다.
정리하면 전화번호 없는 가입은 시그널이 오래 받아온 프라이버시 지적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이며, ZKP라는 이미 검증된 도구가 그 토대가 될 수 있다. 다만 현재까지의 내용은 상당 부분 커뮤니티 논의와 추정에 기반하고 있고, 연결 해제의 완전성, 로컬·서버 잔여 데이터, 스팸 억제 정책 같은 결정적 세부는 공식 발표로 확인돼야 한다. 이 기능을 도입 검토하는 조직이라면 마케팅 문구가 아니라 공개된 암호학 사양과 남용 방지 정책의 실제 설계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