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소설에서 같은 곡선을 그린다는 독자가 있다. 처음에는 지루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문예 매체 퍼블릭 북스에 실린 한 에세이는 이 전환점을 시(詩)의 용어에서 빌려 '볼타(volta)'라고 부른다. 원래 볼타는 소네트에서 첫 8행(옥타브)과 뒤이은 6행(세스텟) 사이, 혹은 앞 12행과 마지막 2행 사이에 나타나는 전환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탈리아어로 '돌아섬'을 뜻하는 이 단어처럼, 시에서는 화자가 그때까지 다루던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한다.
소설의 볼타는 관점의 전환이라기보다 '읽는 감각 자체가 즐거워지는' 지점이다. 필자는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조차 이 전환이 오리라는 기대에 기대어 초반의, 때로는 중반의 지지부진함을 견딘다고 말한다. 언젠가 무언가가 딱 맞아떨어지면 읽기가 쉬워질 뿐 아니라 멈출 수 없게 된다는 믿음이다. 반대로 이 소설에는 볼타가 없다고 미리 알려준다면(실제로 없는 경우도 있다) 아예 펼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볼타는 사람마다 다른 지점에서 온다
흥미로운 대목은 볼타가 언제 오는지가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점이다. 필자는 친구 몇 명에게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연애의 종말'을 함께 읽게 하고 각자 볼타를 느낀 순간을 물었다. 한 사람은 불과 20쪽 만에, 다른 사람은 75쪽 무렵 한 인물이 잠시 서술을 넘겨받아 밝힌 사실이 앞선 사건들을 새롭게 비추면서 전환을 경험했다. 필자 자신은 원래 서술자가 돌아와 여러 줄거리가 충돌 궤도에 있음이 분명해진, 조금 더 뒤에서 볼타를 느꼈다. 소네트의 볼타는 교사가 펜으로 표시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 만큼 객관적이지만, 소설의 볼타는 독자의 감수성에 따라 도착 지점이 달라진다.
그럼에도 이것은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게 이 글의 관찰이다. 일화적 증거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대부분의 독자가 대부분의 소설에서 어느 순간 볼타를 겪는다는 것이다. 무엇이 방아쇠가 되는지도 사람마다 갈린다. 어떤 이는 이야기의 긴장이 처음 고조되는 순간, 어떤 이는 매력적인 인물의 목소리, 또 어떤 이는 문장 차원의 형식적 장치에서 전환을 느낀다. '제인 에어'의 볼타를 묻자 누군가는 헬렌 번스의 죽음을, 누군가는 제인과 로체스터의 첫 만남을 꼽았다.
'읽지 않는 세대'에 던지는 시사점
이 에세이가 겨냥하는 실제 맥락은 학생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우려다. 긴 서사를 이해할 인지 능력과 끝까지 붙들 집중력이 부족하다는 진단이 나오고, 그 원인으로 스마트폰, 코로나, 파닉스 기반 읽기 교육의 쇠퇴, 완결된 텍스트 대신 발췌문을 나눠주는 '시험용 수업' 등이 지목된다. 필자는 이 모두가 책임이 있을 수 있다면서도, 다른 이유를 덧붙인다. 학생들은 소설이 원래 초반에는 지루하게 느껴지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 즉 볼타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는 것이다. 어릴 때 자연스럽게 그 '스위치가 켜지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100쪽을 읽고도 재미없을 때 '소설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는 편이 오히려 논리적이다.
해법은 단순해 보인다. 볼타의 존재를 알려주면 된다. 그러나 필자는 신중해야 한다고 못 박는다. 볼타가 늦게 오거나, 왔을 때 그리 강렬하지 않으면 끝까지 읽은 선택을 정당화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볼타에 대한 기대 때문에 한정된 시간에 진작 덮었어야 할 소설을 붙들고 있던 것을 후회한 적도 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볼타가 오면 반드시 만족할 것'이라 장담하기보다, '이 소설이 무엇을 드러낼지'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는 장치로 쓰자고 제안한다.
도구를 다루는 사람에게
이 이야기는 문학 밖에서도 곱씹을 만하다. 새로운 언어나 프레임워크, 두꺼운 기술 문서, 낯선 코드베이스를 붙들 때 실무자들이 겪는 곡선과 닮았기 때문이다. 처음의 저항과 지루함을 '나와 맞지 않는다'는 신호가 아니라 아직 전환점에 이르지 못한 상태로 이해하면, 견디는 방식이 달라진다. 다만 이 글이 경계하는 지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전환이 온다는 보장이 없고, 온다 해도 그동안 쏟은 시간을 다 보상하지 못할 수 있으므로, 언제 손을 떼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각자의 몫이다.
에세이는 볼타가 소설을 다시 펼치게 만드는 힘이라는 데서 마무리로 향한다. 한 번에 다 읽을 수 없는 긴 이야기를 우리가 몇 번이고 돌아가 이어 읽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고, 그런 점에서 소설과의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를 닮았다는 것이다. 언젠가 나아지리라 믿으며 곁을 지키는 관계 말이다. 차이가 있다면, 소설은 그 길이가 유한하다는 것을 우리가 늘 안다는 점이다. 애매한 감정으로 붙들고 있는 작품에도 최소한 그 위안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