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을 두고 "우정을 파괴하는 게임"이라는 별명이 붙는 경우는 흔치 않다. 1954년 하버드 법학과 학생이던 앨런 B. 칼하머가 만든 디플로머시(Diplomacy)가 바로 그런 게임이다. 30만 부 이상 팔렸고 모노폴리, 클루, 스크래블과 함께 게임스 매거진 명예의 전당에 올랐을 만큼 전략 보드게임의 고전이지만, 한 판을 끝까지 해본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일곱 명의 플레이어와 일고여덟 시간이 필요하고, 초기 30년간 주류였던 우편 대국 방식으로는 한 게임이 1년 넘게 이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규칙 자체는 놀랄 만큼 단순하다. 게임판은 1914년 유럽 지도로, 19개 바다 구역과 56개 육지 구역으로 나뉘고 그중 34곳이 '보급 기지'다. 각 플레이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터키,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중 한 강대국을 맡아 세 개(러시아는 네 개)의 말을 움직인다. 모든 말은 힘이 같고 한 칸씩만 이동하며, 두 말이 같은 칸을 노리면 둘 다 멈춘다. 제3의 말이 '지원'을 보태면 그 말이 대치에서 이긴다. 목표는 보급 기지 18곳 확보지만 실제로 그렇게 끝나는 일은 드물고, 대개 둘 이상의 플레이어가 무승부에 합의하며 마무리된다.
운이 없는 게임, 남는 것은 협상뿐
디플로머시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는 두 가지다. 첫째, 순서대로 말을 옮기는 대신 모두가 자기 수를 종이에 적어 상자에 넣고, 이를 한꺼번에 읽어 모든 말이 동시에 이동한다. 둘째, 매 수를 두기 전 플레이어들은 전체 또는 개별적으로 협상할 시간을 갖는다. 주사위도 카드도 없으니 운이라는 변수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게임을 움직이는 유일한 변수는 상대를 내 뜻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설득력이다. 협상이 곧 핵심 메커니즘이고, 그 협상에서는 배신을 포함해 무엇이든 허용된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과 밀어내는 혐오가 같은 지점에서 나온다.
원문 필자가 2014년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의 기숙사 지하에서 겪은 일화는 이 게임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초보였던 그는 노련한 플레이어 브라이언 엑턴의 동맹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후 여덟 시간 동안 다른 플레이어들이 번갈아 다가와 "저 사람이 너를 조종하고 있다, 먼저 배신하라"고 속삭였다. 그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한 사람에게만 충성하는 편을 택했지만, 결국 동맹이던 영국 담당자에게 스페인 전선에서 버림받으며 탈락 위기에 몰렸다. 남은 것은 굴욕감과 자기혐오뿐이었다. 누구를 믿었어야 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는 그의 고백이, 정보 비대칭 속에서 신뢰를 판단해야 하는 이 게임의 잔혹함을 요약한다.
팬진과 우편이 살려낸 게임의 역사
초기 판매는 부진했다. 칼하머는 1959년 자비로 500세트를 찍어 뉴욕 완구점에 팔았고, 1961년 게임스 리서치가 판권을 이었지만 일곱 명을 하루 종일 모으기 어렵다는 현실적 장벽에 부딪혔다. 게임을 되살린 것은 뜻밖에도 SF 팬덤이었다. 1963년 SF 팬진 편집자 존 보드먼이 자신의 잡지에 우편 대국 참가자를 모집하는 광고를 냈고, 그해 5월 최초의 우편 대국과 첫 디플로머시 팬진 '그라우스타크'가 탄생했다. 4년 안에 우편 게임을 담은 팬진이 최소 32종으로 불어났고, 대면 대국을 겨루는 딥콘(DipCon)이라는 연례 대회로 이어졌다.
1976년 대형 전략게임 출판사 아발론 힐이 판권을 사들이면서 게임은 국제 무대로 확장됐다. 아발론 힐의 컨벤션 '오리진스'에서 열린 딥콘에는 약 230명이 모여 북미 최대 규모를 기록했고,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급성장했다. 1988년 영국 버밍엄에서 첫 월드 딥콘이 열렸으며 이후 매년 개최국을 바꿔가며 지금까지 열 개 나라를 돌았다. 월드 딥콘 우승자는 디플로머시 커뮤니티에서 공식 세계 챔피언으로 인정받는다.
실무자가 이 게임에서 읽을 것
1966년 브루클린의 열일곱 살 소년 에디 버산의 사연은 이 게임이 사람의 심리를 얼마나 깊이 건드리는지 보여준다. 어머니의 가출과 배신을 겪은 그에게 치료사가 "배신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라며 건넨 선물이 바로 이 게임이었다. 그러나 우편 대국 중반, 3자 무승부를 앞둔 에디는 상대의 편지를 가위와 펜으로 조작해 "나는 무승부에 반대하며 기지 세 곳을 더 차지하겠다"는 위조문으로 바꿔 제3의 플레이어에게 부쳤다. 신뢰를 배우려던 도구가 정교한 기만의 훈련장이 된 셈이다.
협업 도구와 원격 협업이 일상이 된 IT 실무자에게 디플로머시는 흥미로운 거울이다. 운도 개인기도 아닌, 오직 정보 공유와 합의·배신의 동학만으로 결과가 갈린다는 점에서 이 게임은 이해관계가 얽힌 조직의 협상 그 자체를 압축한다. 동시에 이 게임의 한계도 분명하다. 승패가 관계의 파괴 위에 세워지고, 참가자층이 지극히 동질적(2014년 87명 중 여성 2명)이라는 점은 '완전 정보·무작위성 제로'라는 설계가 반드시 건강한 상호작용을 낳지는 않음을 보여준다. 신뢰를 설계 변수로 삼되 그것을 소모품으로 다룰 때 무엇이 남는가—디플로머시는 60년 넘게 그 질문을 실험해온 오래된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