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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것과 두꺼운 것: AI 콘텐츠 시대에 다시 읽는 '깊이'

얇은 것과 두꺼운 것: AI 콘텐츠 시대에 다시 읽는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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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께'란 무엇인가

블로그 '실험적 역사(Experimental History)'의 한 에세이는 위대한 예술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르는 기준으로 '두께(thickness)'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정의는 단순하다. 두꺼운 작품은 당신이 주의를 기울일수록 더 많은 것을 되돌려준다. 시간을 들여 들여다볼수록 새로운 층위가 펼쳐지고, 그 반응성 자체가 중독적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얇은 작품은 처음 본 순간이 전부다. 흥미로운 지점은 두께가 양날의 검이라는 사실이다. 꼼꼼한 독자에게 보상을 주는 작품은 종종 대충 보는 독자를 밀어낸다. 겉만 훑어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보물이 안쪽에 숨겨진 '어두운 동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필자는 학창 시절 이 사실을 아무도 일러주지 않은 탓에 고전 문학을 '헛수고'로 오해했다고 고백한다.

엉덩이에 적힌 악보가 알려준 것

필자가 두께를 실감한 계기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세속적 쾌락의 동산' 삼면화였다. 세 번째 패널에는 한 벌거벗은 남자의 엉덩이에 악보가 적혀 있다. 2012년 오클라호마 크리스천대학의 학생 어밀리아 햄릭이 이 '엉덩이 음악'을 채보해 녹음하고 블로그에 올리면서 화제가 됐다. 그러나 중세 음악 전문가 이언 피트먼의 분석에 따르면 이야기는 훨씬 두꺼웠다. 이 채보는 햄릭이 처음이 아니었고(1978년 아트리움 무지케의 음반 등 앞선 시도가 여럿 있었다), 무엇보다 그 악보는 애초에 연주 가능한 음악이 아니었다. 음자리표가 없고 음표 간격이 무작위이며 오선의 줄 수마저 다르다. 연주하려면 없는 것을 지어내야 하는데, 필자는 이를 두고 LLM이 했다면 '환각(hallucination)'이라 불렀을 행위에 빗댄다. 판본마다 소리가 제각각인 것도 그래서다. 보스는 세속 음악을 지옥으로 가는 길로 여겼고, 연주 불가능한 악보는 비밀이 아니라 경고였다는 것이다.

두꺼움을 만드는 네 가지 재료

에세이는 두께의 '농후제' 네 가지를 꼽는다. 첫째, 버려진 시도의 흔적이다. 호쿠사이가 33세, 44세, 46세, 72세에 같은 아이디어를 거듭 그린 네 판본처럼, 완성작 뒤에 쌓인 폐기물 더미가 두께를 만든다. 둘째, '깨뜨릴 달걀'을 남겨두는 것이다. 케이크 믹스에 달걀 가루 대신 진짜 달걀을 넣게 한 상술처럼, 두꺼운 작품은 독자가 스스로 채워 넣을 여지를 남긴다. 그레이엄 베이스의 그림책 '11시'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림 속에 범죄의 단서가 숨어 있었음을 드러내고, 진짜 경험은 그것을 알고 다시 읽는 데 있다. 셋째, 의도성이다. '햄릿'에 귀와 관련된 이미지가 반복되듯, '왜 하필 이 단어, 이 장면인가'에 답이 있는 작품이 두껍다. 넷째, 치른 비용이다. 클로이스터스의 15세기 목조 제단화는 그 조각에 들인 시간을 관람객이 무의식적으로 계산하게 만들어 '중요하다'는 신호를 보낸다. 마술사 펜 앤 텔러의 불 먹기 공연에서 펜이 "어떻게 했나가 아니라 왜 했나를 물어라"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처럼 생긴 물건'과 실무의 접점

두께의 반대는 자전거 가게 사람들이 말하는 '자전거처럼 생긴 물건'이다. 안장과 페달, 바퀴와 핸들을 갖췄어도 재료가 싸구려이고 조립이 엉성하면 자전거라 부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영화처럼 생긴 물건, 책처럼 생긴 물건, 생각처럼 생긴 물건이 존재한다. 필자가 든 사례는 한 자기계발서다. "압박 속에서 성과가 좋아진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만으로 실제 성과가 33% 향상된다"는 문장은 뜯어보면 무너진다. 인용된 논문에서 그 '33%'라는 수치를 찾을 수 없었고, 여기서 말하는 '성과'가 사실은 객관식 시험 점수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작고 결함 있는 실험 하나가 "연구에 따르면"이라는 얼버무림 아래 과잉 일반화되는 전형이다.

이 이야기는 IT 실무자에게 남의 일이 아니다. 생성형 AI가 텍스트와 이미지를 대량으로 찍어내는 지금, 우리는 '책처럼 생긴 물건'과 '콘텐츠처럼 생긴 물건'을 그 어느 때보다 쉽게 만들 수 있다. 겉모양은 완결돼 보이지만 다시 볼 이유가 없는, 첫인상이 전부인 얇은 결과물이다. 엉덩이 악보처럼 실재하지 않는 것을 그럴듯하게 채워 넣는 환각은 이 얇음의 극단적 형태다. 반대로 두께의 네 재료, 즉 버려진 시도의 흔적, 사용자가 채울 여지, 세부의 의도성, 실제로 치른 비용은 제품과 문서, 인터페이스를 설계할 때도 유효한 점검표가 된다.

물론 이 글은 엄밀한 이론이 아니라 개인적 회고에 가깝다. '두께'는 정의가 흐릿하고, 네 가지 재료 역시 저자 스스로 단정적 답은 없다고 인정하는 느슨한 분류다. 두께가 곧 좋음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프레임이 쓸모 있는 이유는 무엇이 주의를 보상하고 무엇이 그렇지 못한지를 되묻게 만들기 때문이다. 도구가 생산 비용을 0에 가깝게 낮출수록, 역설적으로 '치른 비용'과 '되돌려주는 깊이'는 다시 희소한 가치가 된다.

SOURCE · HACKER NEWS
원문 전체 보기 → https://www.experimental-history.com/p/i-like-em-th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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